젊은 시절 리처드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를 처음 읽었을 때의 충격이 지금도 생생하다. 이성 간의 아름다운 사랑, 어린아이의 귀여움 등, 우리가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느끼는 인간 본연의 감정을 유전자의 입장에서 명쾌하게 설명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닫고 경악했다. 약간의 과장과 비유를 섞어서 도킨스는 “우리는 유전자로 알려진 이기적인 분자를 보존하기 위한 맹목적으로 프로그램된 로봇 운반자”라고 선언한다. 내가 소중하게 생각하는 바로 이 몸은 쓰임새가 별로 없으면 이기적 유전자가 얼마든지 다른 것으로 갈아탈 수 있는 탈것이라는 얘기다.
오늘 소개할 책은 KAIST 바이오및뇌공학과 최정균 교수의 <유전자 지배 사회>다. 책의 부제 “정치, 경제, 문화를 움직이는 이기적 유전자, 그에 반항하는 인간”이 책의 짧은 요약이다. 도킨스가 생생하게 보여준 이기적 유전자의 관점을 더욱 확장해 정치, 경제, 문화에 미치는 유전자의 힘을 차근차근 설명하는 것이 책 내용의 요약이라면, 부제의 마지막 부분 “그에 반항하는 인간”은 저자 주장의 요약이라고 할 수 있다. 유전자와 자연의 가차 없는 맹목적 힘에 우리 인간은 저항할 수 있고, 그리고 저항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1976년 출판된 <이기적 유전자>의 독자라면 <유전자 지배사회>도 함께 읽기를 추천한다. 반세기 전 <이기적 유전자>가 출판된 후 최근까지의 여러 중요 연구를 소개하고, 이렇게 구성된 단단한 토대 위에서 저자의 주장이 활발하게 펼쳐진다.
책을 펼치고 서문을 읽다가 저자의 단호함에 강한 인상을 받았다. 저자는 이미 기성종교가 실패했으며, 이 책을 통해 이미 생명을 잃은 기존의 기독교를 완전한 죽음으로 몰고 가겠다고 말한다. 서문의 마지막이 특히 인상적이다. “생명의 진화를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다는 사람들의 본능을 논리로 만족시킬 방법은 없다. 이 책에서도 그런 노력은 하지 않을 것”이라고 선언한다. 책의 6장을 읽고 나면 저자의 강한 비판이 향하는 곳이 완고하게 굳어진 ‘기존의 기독교’일 뿐이라는 것을 명확히 알 수 있다. 꼼꼼히 성서를 다시 읽으며 문장 사이에 담긴 깊은 의미를 고민한 저자는 오랫동안 왜곡되어 오해된 성서의 정신을 과학과 진보를 지지하는 이들의 사상으로 새롭게 재탄생시키자고 주장한다.
남녀 사이, 그리고 부모-자식 사이의 사랑은 유전자가 자신의 복제본을 늘리는 과정에 도움을 주도록 우리 머릿속에 장착된 심리적 메커니즘이다. 그렇지 않다고 말하기 어려운 불편한 진실이다. 아이 유전자의 입장에서는 부모가 귀엽게 느끼는 외모와 행동을 발현하는 것이 유리하고, 부모 유전자의 입장에서는 아이의 외모와 행동을 귀엽게 느끼는 감정을 갖도록 하는 것이 유리하다. 부모-자식 사이가 늘 이렇게 둘 다 승자가 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책에 소개된 산모와 태아 사이의 갈등에 관련된 얘기가 무척 흥미롭다. 임신한 산모는 다음번 임신으로 태어날 수도 있는 아이도 고려해 과도한 자원을 현재의 태아에게 투자하려 하지 않는다. 한편 태아는 미래의 동생보다 자신이 훨씬 더 중요해서 산모로부터 더 많은 포도당을 빼앗아 오기 위해 엄마의 인슐린 작용을 방해하는 물질을 분비한다. 그렇다고 산모가 순순히 물러나지는 않는다. 태아에 대항해 산모는 인슐린 분비량을 늘리고, 태아는 또 엄마의 인슐린 분비를 방해한다. 이렇게 둘 사이의 줄다리기가 진행되는 것이 임신성 당뇨다. 태아가 산모의 인슐린 분비를 방해하는 물질은 너무나 흥미롭게도 엄마가 아닌 아빠로부터 물려받은 염색체에서 만들어진다. 아빠 유전자의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고개를 끄덕일 수 있다. 미래에 태어날 수도 있을 태아의 동생이 같은 아빠의 유전자를 갖는다는 것은 확신할 수 없다. 아빠는 바뀔 수도 있으니 말이다. 결국 아빠 유전자의 입장에서는 현재의 태아가 산모에게서 더 많은 영양분을 받아내는 것이 내 아이가 아닐 수도 있는 미래의 동생에게 영양분을 양보하는 것보다 훨씬 유리하다. 엄마는 아빠와 다르다. 당연히 태아의 동생도 엄마의 유전자를 가질 것이 확실하니 말이다. 아이는 늘 엄마의 아이지만, 아빠는 아이가 자신의 아이임을 100퍼센트 확신하지 못한다는 모계와 부계의 불확실성 차이로 설명할 수 있는 또 다른 현상이 있다. 외할머니-엄마-아이로 이어지는 관계는 확실하지만, 친할아버지-아빠-아이로 이어지는 관계는 불확실하다. 실제로도 친할아버지보다 외할머니가 손주들에게 더 많은 돈을 쓴다는 연구 결과가 있다고 한다. 엄마와 태아 사이의 유전자 수준의 갈등과 이때 태아를 편드는 아빠의 유전자 얘기, 외손주에게 더 마음이 가는 외할머니 얘기가 재밌다. 조부모, 부모, 아이로 이뤄진 행복한 가족의 몸 안에서는 유전자가 일으킨 갈등 상황이 치열하게 전개되고 있다.
유전자는 혐오와 차별을 만들어 내기도 한다. 유전자는 처음 만난 사람, 특히 피부색 등이 달라 명확히 외모로 구별되는 이들에 대해 무의식적인 두려움을 일으킨다. 안전한데 위험하다고 판단하는 것과 위험한데 안전하다고 판단하는, 성격이 다른 두 오류를 비교해 보자. 유전자의 입장에서는 위험할 수도 있을 일말의 가능성이 있다면 일단 피하고 보는 것이 질병 감염 등의 위험을 줄이는 방법이 된다. 결국 이러한 방어기제가 과잉 발현되면 이민자와 타 인종에 대한 혐오를 일으키게 된다. 과거 학계에서는 인종이 아무런 생물학적 근거가 없다는 주장이 있었지만, 저자가 소개하는 최근의 연구는 결론이 다르다. 100개 정도의 유전자 변이만으로도 100% 정도의 정확도로 인종 분류가 가능하다. 과학에서는 사실에 대한 판단을 가치에 대한 판단으로 오해하는 것을 극도로 경계하는데, 과거 인종이 과학적 근거가 없으니 인종 차별을 하지 말아야 한다는 주장도, 아무리 의도가 선하다고 하더라도 사실 판단을 가치 판단으로 확장하는 주장이라고 할 수 있다. 저자는 “자연이 그러하므로 우리도 그래야 한다”가 아니라 “자연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니 한발 더 나아가, 자연이 그러하므로 우리는 그러지 않아야 한다”고 말한다. 인종 간 차이가 자연에 존재하므로 오히려 우리는 인종에 따른 차별을 하지 않으려는 노력에 힘써야 한다는 주장이다. 같은 맥락으로 저자는 또 “자연은 모범이 아니라 반면교사다.”라고 말한다. 책의 부제처럼, 우리는 유전자에 저항할 수 있고, 저항해야 하는 의식적인 존재다.
방대한 내용을 방대한 참고문헌으로 뒷받침하는 책의 내용 중 내게 특히 인상적이었던 것은 보수와 진보라는 정치적 성향에 대한 얘기였다. 사람들은 흔히 변화를 거부하는 이들을 보수, 추구하는 이들을 진보라고 생각한다. 그렇지 않다. 보수가 지지하는 자유시장은 우리 사회의 전통적인 경제체제와는 명확히 다르다는 것에서 알 수 있다. 흔히 보수가 자유를 추구한다고 주장하지만, 그것도 경제에 관련되었을 때의 얘기일 뿐이다. 낙태의 자유를 옹호하는 것은 오히려 보수가 아니라 진보다. 책에는 경제, 국방, 이민정책, 낙태, 종교, 과학기술 등 여러 사안에 대한 보수와 진보의 입장 차가 정리된 표가 실려 있다. 보수와 진보의 차이는 상당히 일관적인데, 변화에 대한 수용 여부로는 둘의 입장 차를 전혀 설명할 수 없다.
진보와 보수의 생물학적 차이는 여러 연구로 뒷받침된다. 외부의 갑작스러운 위험 자극에 대해 우리 몸은 교감신경을 활성화해서 반응한다. 그리고 우리 뇌 안의 편도체 부위가 공포와 혐오 등의 감정에 크게 관여하는데, 보수적 성향이 강할수록 편도체의 회색질 부피가 크다고 한다. 또한 편도체의 활성에 관여하는 세로토닌의 작용을 강화하는 변이가 보수에서 발견된다. 세로토닌은 규범을 준수하고, 질서와 권위를 중시하며, 종교적 성향, 위험 회피, 그리고 이론적이고 복잡한 것보다 구체적이고 분명한 것을 선호하게 만드는 신경전달물질이다. 진보는 보수와 다르다. 진보적 성향이 강한 이들은 감정 조절과 충동 제어에 관여하는 전측대상피질의 회색질 부피가 크다고 한다. 보수의 뇌가 세로토닌의 영향을 크게 받는다면 진보를 특징짓는 신경전달물질은 새로운 것을 탐색하게 하는 도파민이다.
세로토닌의 활성과 편도체의 발달은 진화의 관점에서는 무척이나 필요한 일이다. 즉, 보수적 성향은 생존과 번식을 위한 진화적 전략의 발현이다. 보수적인 성향을 가진 가정이 진보적인 사람들에 비해 유의미하게 더 많은 자녀를 가진다는 연구 결과가 있다. 진화의 과정에서 보수적 성향이 양의 선택을 받는다는 것을 보여준다. 세월호 때의 경험에서도 알 수 있듯이 보수적 성향을 가진 사람은 공동체가 아닌 개인에게서 책임을 묻는 성향이 강하다. 이들은 이론적인 사고의 성향이 약할 뿐 아니라, 자연을 주어진 그대로 받아들이는 성향이 강해서 자연을 인위적인 변형의 대상으로 보지 않아 과학기술에 대해 진보보다 비우호적이다. 짐작할 수 있듯이 과학계에는 진보가 많다. 지난 미국 대통령 선거 초기, 과학자 중 바이든을 지지한 비율은 86%에 이르러 트럼프를 지지한 8%보다 훨씬 더 높았다는 것이 과학계에 보수보다 진보가 훨씬 많다는 것을 보여준다. 비슷한 통계를 우리나라에서 보지는 못했지만, 내 주변을 보면 나 역시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학계, 예술계, 문화계, 연예계에 보수보다 진보가 많다는 것은 나만의 느낌은 아닐 것이다. 보수주의자의 종교적 성향이 강한 것도 마찬가지로 이해할 수 있는데, 저자는 진화의 목적에 부합하게 빚어진 뇌일수록 오히려 진화의 과정을 부인한다고 말한다. 일종의 아이러니라고 할 수 있다. 저자가 말하는 또 다른 아이러니가 있다. 보수의 교감신경 활성을 생각해 보라. 한 인간 몸 안의 생리학적 교감이 다른 인간과의 정서적 교감을 가로막는다는 역설이다. 저자는 진보는 진화로부터의 일탈이자 자연에 대한 저항과 도전이라고 말한다.
종교와 성서에 대한 고민을 담고 있는 책의 마지막 부분도 참 좋았다. 저자의 글을 소개하며 이 글을 마친다. “성서는 자연을 신으로 섬기던 인간들을 불러내 예수를 모범으로 삼아 스스로 신이 되라고 말한다. 자연에서 신성을 벗겨낼 뿐 아니라, 인간의 본성에서 자연성을 벗겨내고 그것에 저항해야 한다. 번식욕과 혐오를 넘어서는 사랑, 차별, 배제가 아닌 포용과 연대, 착취와 탈취가 아닌 가치와 창조의 나눔을 추구하라고 말한다. 성서에서 ‘종교적 도금’을 벗겨내면 진짜 주인공을 만나게 된다. 바로 인간이다. 인간이 바로 창조주다. 예수의 형상을 본받아 따르려는 신적 인간이 그들이다. 인간은 창조의 사명을 부여받았다. 창조란 태초에 일어난 일회적 사건이 아니라, 지금 바로 이 세상에서 일어나고 있으며 앞으로도 끝없이 진행되어야 하는 과정이다. 자연 속에 던져진 우리 인간이 무의미한 우주에서 의미를 만들어 나가는 과정이다.”
*책을 읽고 함께 이야기 나눌 주제:
1. 저는 책을 읽으면서 저자가 참 용감한 과학자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여러분은 어떠셨나요?
2. 이타성은 행위의 결과로 판단되는 것일까요. 아니면 행위의 의도가 이타성의 기준이 되어야 하는 것일까요?
3. 저자는 창조론이나 지적설계론은 이미 완벽히 패배해서 더 이상의 논쟁도 필요치 않다고 말합니다. 기성종교는 이미 실패했다고 단언합니다. 하지만, 아직도 일부 종교계는 여전히 창조론을 사람들에게 얘기하고 있죠. 과학자들이 안심해도 되는 것일까요?
4. 가정, 사회, 경제, 정치, 종교 등의 영역에서 우리 인간이 벌이는 행위의 근간에는 이기적 유전자에 관한 진리가 자리잡고 있다고 저자는 말합니다. 책에서 읽은 내용 중 인상적이었던 것은 어떤 것인가요?
5. 유전자의 큰 힘을 인정하는 것과 유전자 결정론은 어떤 차이가 있는 것일까요?
6. “이기적 유전자가 부추기는 자식 사랑” “혐오의 진화적 근원은 유전자의 두려움” 같은 의인화한 은유적 표현은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명확하게 하지만 마치 유전자가 어떤 욕구나 목적을 가진 행위자인 것으로 오해될 위험도 있습니다. "이기적 유전자가 부추기는 자식 사랑"을 은유 없이 표현해 보세요.
7. 이성 간이나 부모 자식 사이의 사랑을 유전자의 작동으로 설명하면 사람들은 불편해 합니다. 사람들이 느끼는 불편함의 근원은 어떤 것일까요?
8. 자연에 대한 사실에 기반한 객관적인 이해는, 자연이 우리에게 미치는 막강한 힘을 극복하기 위해서도 꼭 필요한 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이기적 유전자에 반항해야 할 문제의 예와 함께, 반항의 방법도 들려주세요.
9. 보통 우리는 평화롭고 조화로운 자연을 인간이 본받고 따라야 하는 것으로 상정할 때가 많습니다. 저자는 자연은 본질적으로 인간에게 적대적이며 잔혹하다고 말하며 인간은 자연의 무자비함에 이성으로 반항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여러분이 생각하는 자연은 어떤 것인가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