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습기살균제 결국 유죄, 피해자 눈물 제대로 닦아라 [마포나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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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습기살균제 결국 유죄, 피해자 눈물 제대로 닦아라 [마포나루]
  • 서중달 기자
  • 승인 2024.01.12 15: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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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가 안전성 확인 필요 의견 무시하고 국민 상대 독성 시험”
SK케미칼·애경산업 제품, 2심에서 폐 질환과 인과관계 인정
가습기살균제 피해자 비상대책위원회 등 시민단체 관계자들이 지난 11일, 가습기살균제 관련 2심이 열리는 법정 주변에서 SK케미칼과 애경산업 관계자들에 대한 엄벌을 촉구하는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사진=온라인커뮤니티
가습기살균제 피해자 비상대책위원회 등 시민단체 관계자들이 지난 11일, 가습기살균제 관련 2심이 열리는 법정 주변에서 SK케미칼과 애경산업 관계자들에 대한 엄벌을 촉구하는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사진=온라인커뮤니티

SK케미칼과 애경산업이 제조·판매한 가습기살균제로 인한 피해자들도 본격적으로 손해배상 청구 소송에 나설 것으로 보인다. 1심에서 이들 기업의 제품과 피해 상관성을 인정하기 어렵다며 무죄를 선고했던 재판부가 2심에서 폐 질환이나 천식을 유발한다고 인정, 1심 판결을 뒤집었기 때문이다. 여기에 1심 이후 2년여 동안 최신 연구 결과 등 방대한 분량의 증거자료를 차곡차곡 모아 제출한 검찰과 이를 채택한 법원의 달라진 모습도 눈길을 끌었다.

서울고등법원 형사5부(부장 서승렬·안승훈·최문수)는 지난 11일 업무상 과실치사 등의 혐의로 기소된 홍지호 전 SK케미칼 대표와 안용찬 전 애경산업 대표에게 각각 금고 4년형을 선고했다. 다만 인과관계 인정 여부 등은 여전히 법리적 다툼이 크다고 보고 법정 구속은 하지 않았다. 함께 기소된 SK케미칼과 애경산업, 이마트 관계자 등 11명에 대해서도 금고 2년~3년6개월이 선고됐다.

앞서 2021년 1월 1심에선 이들 회사가 제조·판매한 가습기살균제 ‘가습기메이트’의 성분인 클로로메틸아이소티아졸리논(CMIT)과 메틸아이소티아아졸리논(MIT)이 폐 질환 등을 유발한다는 사실이 입증됐다고 보기 어렵다며 피고인 전원에게 무죄를 선고했었다.

이에 검찰은 항소심에서 CMIT·MIT가 폐에 도달해 폐 질환을 일으킬 수 있다는 정부의 최신 연구 결과 등 100개의 증거 및 23개의 참고 자료를 2심에서 새로 제출했다. 증거 기록만 총 3753쪽에 달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2심 재판부는 검찰이 제출한 증거들을 바탕으로 CMIT·MIT가 폐포에 도달해 폐를 손상시킬 수 있다고 봤다. 제품 설명서에 기재된 권장 사용량 만으로도 인체에 위해한 수준의 이들 성분이 검출됐다는 연구 결과 등을 제시하며 “살균제 사용과 폐 질환 등의 구체적 인과관계의 신빙성이 인정된다”고 1심을 뒤집었다.

재판부는 특히 SK케미칼의 전신인 유공이 1994년 ‘유공 가습기메이트’를 출시할 당시 생물공학연구실이 이 제품에 대해 독성시험을 수행해 안전을 담보해야 한다는 의견을 냈음에도 이를 무시했고, 서울대 수의과 대학에 실험을 의뢰했음에도 결과가 나오기 전 제품을 판매한 점을 지적했다. 제조·판매업자에게 당연히 요구되는 주의 의무를 위반한 업무상 과실에 해당한다고 판단했다.

재판부는 유공이 제품을 출시한 이듬해 서울대 수의학과의 실험 결과 ‘백혈구 수치 감소 등의 유의미한 변화가 나타나 더 실험이 필요하다’는 내용을 접하고도 가습기살균제의 판매 중지나 회수 조치를 하지 않은 사실을 엄중하게 질타했다. 유공이 추가 연구 필요성 등의 의견을 무시함으로써 이후 애경산업 등 타기업에서도 가습기살균제 판매가 이뤄졌고, 대규모 인명피해로 이어졌다고 문책했다.

재판부는 “사실상 장기간에 걸쳐 전 국민을 상대로 가습기살균제의 만성 흡입독성 시험이 행해진 사건”이라며 “불특정 다수가 원인을 모르는 상태에서 큰 고통을 겪었고, 상당수 피해자는 사망이라는 돌이킬 수 없는 참혹한 피해를 입는 등 존엄성을 침해당했다”고 지적했다.

이번 선고로 폴리헥사메틸렌구아니딘(PHMG)이나 염화에톡시에틸구아니딘(PGH) 성분이 포함된 옥시 가습기살균제 피해자뿐 아니라 CMIT·MIT 성분의 가습기살균제를 사용한 피해자들도 손해배상 청구에 나설 것으로 보인다. 검찰은 2018년 CMIT·MIT 성분의 가습기살균제에 대해서도 재수사를 해 98명에게 폐 질환이나 천식 등을 앓게 하고, 그중 12명을 사망케 한 혐의로 홍 전 대표와 안 전 대표 등을 기소했었다.

한편 가습기살균제 피해지원 종합포털에 지난해 말까지 구제급여를 신청·접수한 신고자는 7891명에 달하며 이 가운데 피해구제 인정자는 5691명(생존 4429명, 사망 1262명)이다. 하지만 피해자들 가운데 기업으로부터 손해 배상을 받은 사람은 500여명에 불과한 것으로 알려졌다.

1994년 처음 판매된 가습기살균제 피해가 처음 밝혀진 2011년으로부터 14년이 흘렀다. 자신들도 모르는 사이에 소중한 가족을 잃고 자신들까지 후유증에 시달리고 있는 피해자들을 대하며 국민들 또한 비통함과 분노를 함께 느껴왔다. 제품 안전성을 확인하지 않은 채 독성물질을 내뿜는 가습기살균제 출시를 밀어붙인 경영자의 한순간 잘못된 판단으로 빚어진 사회적 참사는 ‘가만 있으라’로 시작된 세월호 대참사를 떠오르게 한다. 대기업 제품이라 한치의 의심도 없이 믿고 구매했던 제품이 가족들을 죽음으로 내몰았으니, 남아 있는 가족의 고통이 오죽할까. 그야말로 하루하루가 지옥일 것이다. 이번 판결이 피해자들의 억울함을 풀어주기 위한 획기적 계기가 됐으면 한다. 정부와 기업들의 책임있는 후속 대책이 있어야 할 것이다.

재판부도 이날 “피해 원인을 규명하는 과정에서 국가적·사회적 비용이 소요됐을 뿐 아니라 완전한 피해 회복도 이뤄지지 않았다”며 “피고인들도 긴 수사 등 정신적 고통을 받았지만 피해자나 그 가족의 고통에 비할 수 없어 엄정한 처벌이 불가피하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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