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감고 물을 따를 수 있다? 넘치지 않게! [김범준의 세상물정]
상태바
눈감고 물을 따를 수 있다? 넘치지 않게! [김범준의 세상물정]
  • 김범준 편집위원(성균관대 교수)
  • 승인 2024.05.27 08:55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사진=이미지투데이
/사진=이미지투데이

눈을 질끈 감고도 빈 병에 물을 넘치지 않게 가득 담을 수 있다. 믿기지 않는다면 한번 직접 해보시라. 귀를 기울이면서 또르륵 물 떨어지는 소리를 듣다 보면 병에 물이 가득 담기기 직전 물소리가 갑자기 높은 음으로 들릴 때가 있다. 그때 물을 따르는 것을 멈추면 된다.

왼손 손가락으로 기타 줄 어느 곳도 누르지 않고 그냥 오른손으로 줄 전체를 튕기면 양 끝이 고정된 기타 줄 전체가 위아래로 진동한다. 왼손 손가락으로 기타 줄의 중간 부분을 누르고 튕기면 줄 전체가 아닌 일부만 진동하는데, 이때는 우리 귀에 들리는 음의 높이가 전체 줄이 진동하는 경우보다 높아진다. 진동하는 부분의 기타 줄의 길이가 짧을수록 우리 귀에는 더 높은 음의 소리가 들린다. 왼손 손가락으로 어디를 누르는지에 따라 기타 줄 하나로도 여러 높이의 음을 만들어 낼 수 있다. 물리학에서 음의 높이는 진동하는 기타 줄에서 만들어지는 파동의 파장에 관계된다. 진동하는 줄의 길이가 짧아질수록 파장은 줄어들고 진동수는 늘어나는데 우리 귀에 높은 음으로 들리는 소리일수록 진동수가 더 크다. 진동하는 부분의 길이가 줄어들수록 더 높은 음의 소리를 만들어 낸다.

눈감고 빈 병에 물을 따를 수 있는 원리도 비슷하다. 물방울이 병에 담긴 물의 수면에 떨어질 때 우리 귀에 들리는 음의 높이는 수면과 병 입구 사이 공기 기둥의 높이와 관련된다. 병 속 물의 양이 늘어날수록 수면 위 공기 기둥의 높이가 점점 줄어들게 되고, 또르륵 물방울 소리의 음의 높이가 빠르게 높아진다. 빈 병에 물을 따르면서 들리는 소리에 귀를 기울여 보라. 물이 병을 가득 채우기 직전 또르륵 물소리가 갑자기 빠르게 높아지는 것을 들을 수 있다. 이 소리에 귀를 기울이면 눈감고도 병에 물을 넘치지 않게 가득 채울 수 있다.

조용한 방 안에 가만히 앉아 찻잎에 우린 찻물을 찻잔에 따를 때 들리는 또르륵 물소리를 좋아한다. 바쁘게 돌아가는 세상에서 아주 가끔 경험하는 정말 아름답고 평화로운 소리다. 또르륵 물소리를 들으면서 찻물의 온도를 짐작하는 것이 과연 가능할까? 미국 언론 <뉴욕타임스>에 바로 이 문제를 연구한 결과를 소개한 과학 기사가 “Why You Can Hear the Temperature of Water”(당신이 물의 온도를 들을 수 있는 이유)라는 제목으로 실렸다.

과연 우리가 찬물을 컵에 따를 때와 뜨거운 물을 컵에 따를 때 만들어지는 두 소리를 구분할 수 있을까? 소리만으로 어느 쪽 물이 뜨거운지를 알아낼 수 있냐고 물으면 많은 이들이 그럴 리 없다고 고개를 가로젓는다고 한다. 하지만 흥미롭게도 온도가 다른 두 물을 따르는 소리를 녹음한 소리를 들려주면 4분의 3 정도의 실험 참가자가 어느 쪽이 뜨겁고 어느 쪽이 차가운 물소리인지 답을 맞힐 수 있다고 한다. 나도 기사에 포함된 녹음 파일을 듣고 어느 쪽이 더 뜨거운 물인지를 그리 어렵지 않게 알아낼 수 있었다. 조금 더 청아한 또르륵 소리가 찬물 쪽에서, 약간은 좀 더 무딘 느낌의 소리가 뜨거운 물 쪽에서 들린다. 느낌은 알지만 청아하고 무딘 소리가 도대체 어떤 물리적인 속성의 차이 때문에 발생하는지는 금방 답하기는 어려운 문제다.

출판 이전 논문인 프리프린트(preprint)를 심사 과정 없이 올릴 수 있는 인터넷 사이트인 아카이브(arxiv:2403.14740)에서 원논문을 볼 수 있다. 논문 저자들은 먼저 온도가 물소리에 미치는 영향의 원인으로 3가지를 제안한다. ①수면 위 공기 기둥에서 만들어지는 소리(위에서 내가 소개한 소리를 들으면서 물을 채울 수 있는 원리 참고)가 온도에 따라 다를 수 있다. ②떨어지는 물은 유리 용기의 진동을 일으키는 데 온도가 달라진 유리잔이 다른 소리를 만들어 낼 수 있다. ③물속에서 만들어지는 공기 방울의 크기가 온도에 따라 다르면 공기 방울의 크기에 따라 다른 소리가 만들어질 수 있다.

저자들은 먼저 ①과 ②의 가설을 기각한다. 온도에 따라 소리의 전달 속도가 달라지는 것은 맞지만, 그 차이가 그리 크지 않아서 ①로 실험 결과를 설명하기는 부족하다는 것, 그리고 온도에 따라 유리 용기의 특성이 변하는 것은 맞지만 실험에서 이용한 물의 온도 영역에서 그 변화가 그리 크지 않다는 것을 지적하면서 ②번 가설도 기각한다. 이제 남은 것은 ③번이다. 논문의 연구자들은 섭씨 10도의 물과 90도의 물속에서 공기 방울의 크기가 1~2mm와 5~10mm로 다르다는 것을 측정해 냈다.

물리학에서는 진동수 스펙트럼을 이용해 소리에 포함된 다양한 진동수 성분의 크기를 측정한다. 피아노의 ‘도’ 음이나 기타의 ‘도’ 음이 우리 귀에 같은 높이로 들려도 우리가 피아노와 기타의 소리를 명확히 구분할 수 있는 이유는 여러 다른 진동수의 음들이 어떻게 진동수 스펙트럼에서 펼쳐져 있는지와 관련된다. 논문 연구자들은 뜨거운 물을 따를 때 들리는 전체 소리의 진동수 스펙트럼을 차가운 물의 경우와 비교해서, 온도가 높은 물에서 낮은 진동수 성분이 더 크고, 낮은 온도의 물은 거꾸로 높은 진동수 성분을 더 가진다는 것을 그래프로 확인했다.

논문의 저자들은 그렇다면 왜 물의 온도가 높을 때 더 큰 공기 방울이 형성되는지도 제안한다. 온도가 높은 물은 점성이 적어지고 이로 인해 떨어지는 물줄기는 물속에서 더 강한 난류(turbulence)를 만들어 내면서 공기 방울의 크기 분포를 바꾼다는 제안이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더 추가적인 연구가 필요하다는 얘기도 논문에 담겨있다. 온도는 같지만, 점성은 다른 물(예를 들어 설탕물)로 실험을 해보는 것도 필요해 보인다.

감자칩의 바스락 소리와 우리가 느끼는 맛 사이의 관계를 연구해서 2008년 이그-노벨상을 탄 재밌는 연구가 있다. 음식의 소리와 맛의 경험이 우리 뇌에서 서로 연합기억으로 형성되어서 우리 인간은 음식의 맛을 소리로도 느낄 수 있는 존재다. 어쩌면 앞으로 다가올 미래에 음식의 풍미를 위해서 소리를 이용할 수 있을 가능성도 기사에서 제안한다. 앞으로 우리는 조미료뿐 아니라 소리로도 음식에 양념할 수 있을까?

논문의 제1 저자인 X. Bi는 1년 전 화학공학 박사 학위를 받은 후, 현재 대중을 위한 과학 커뮤니케이터로 활동하는 사람이다. 현직 과학자로 연구에 몰두하고 있지 않은 과학 커뮤니케이터가 아무런 재정 재원 없이도 얼마든지 흥미로운 연구를 진행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 내게 큰 인상을 남겼다. 현직 과학자만이 의미 있는 연구를 수행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아직 주목받지 못한 재밌는 과학 문제가 여전히 많은 사람에게 열려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