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을 슬프게 하는 것은 하나도 없다.”
한국 근·현대미술을 대표하는 화가 이대원(李大源, 1921–2005)의 70년 화업을 총체적으로 조망하는 회고전 제목이다. 제목이 아니어도 이대원이 그린 『농원』 앞에 서면 화창한 가을 과수원에 온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잘 익은 과실은 어찌 그리 풍성한지 메마른 내 마음도 곧 넉넉해진다.
《이대원: 당신을 슬프게 하는 것은 하나도 없다》 전시가 오는 11월 8일까지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에서 열린다. 7M에 달하는 『도리화』 앞에 서면 시름을 잊고 행복에 젖는다. 하지만 우리는 안다. 슬픔 하나 없는 사람은 없다는 것을. 그것은 이대원의 삶을 들여다봐서가 아니라, 자기 앞의 생生과 마주해본 사람이라면 갖게 되는 확신이다. 자기 안의 슬픔을 근거로 그림 속 슬픔의 부재를 받아들인다. 자기 몫의 슬픔을 밑바닥에 두지 않고서는 결코 행복을 느낄 수 없다.
이대원은 어려서 종이쪽지에 사람과 동물 그림을 자주 그렸다. 청운초등학교 때는 미술반에서 그림지도를 받았고, 동아일보사가 주최한 학생미술전람회에서 신무문을 그려 입선했다. 경성제2고등보통학교 재학 중에 참가한 중등 미술전에서는 3년 연속 특선을 했다. 4학년 때는 염색공예로 선전에 입선했고, 5학년 때는 유화·공예 두 부문에 입선하기도 했다. 학교의 명예를 높였다 하여 졸업식에서 경기도지사상을 받았다.
미술 선생님에게 추천장을 받아, 도상봉 선생에게서 데생 지도를 받았다. 고교 졸업이 임박해서 미술대학에 지망하겠다고 하니, 온 집안 사람들이 반대했다. 아버지는 법대를 나와 관리나 법관이 되어야 한다는 뜻을 굽히지 않았다. 이대원은 억지로 집안 뜻에 따랐고, 일 년 뒤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에 입학했다. 그때의 실망과 슬픔을 말로 표현할 수 없었다.
유복한 집안에서 태어나 성격 또한 낙천적인 이대원에게는 ‘화단의 신사’, ‘색채의 마법사’,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화가’라는 수식어가 따라다닌다. 하지만 이대원의 삶에도 슬픔은 깃들어 있다. 원하는 미대가 아닌 법대를 다녔고, 학도병으로 동원되었다가 도쿄 대공습에서 전쟁의 참상을 목격했다. 과학 문명을 악용한 인간에 대한 혐오감과 두려움에 마음은 어두워졌다. 한국전쟁이라는 현대사의 비극은 이대원을 깊은 우울로 침잠하게 했다.
화가 이대원은 대부분 주어진 길을 걸었다. 부유한 집안의 막내 아들, 아버지의 기대, 법대 졸업, 기업가라는 사회적 위치. 여기에 타고난 그림 재능과 자연을 느끼는 감수성까지. 화가라는 천직도 재능과 본성을 따른 것이지 이대원 자신이 선택했다고 말할 수 없다. 또한 당시 한국 미술계의 혼란, 서양 미술의 충격, 동양 미술과 공예의 전통 등 이대원을 둘러싼 예술 환경 역시 그에게 주어진 것이다.
이대원은 1959년부터 약 8년간 한국 최초의 상업 화랑 격인 반도화랑을 운영하며 척박한 국내 화랑가의 기틀을 마련했고, 한국 미술을 해외에 알리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1960년대 후반에는 홍익대학교 미술대학 초대 학장과 대학 총장으로 미술교육의 토대를 다졌으며, 대한민국예술원 회장과 외교통상부 문화홍보대사 등을 맡았다. 작품 활동에 매진하고 싶었지만 전시와 교육, 문화행정과 문화외교까지 아우른 이력 역시 자신에게 주어진 책무를 묵묵히 수행한 것이었다.
사람들은 ‘무엇’을 스스로 선택한다고 하지만, 실은 주어진 것이 대부분이다. 자신이 욕망했다지만, 실제로는 타자의 욕망이거나 미디어가 주입한 것이라고 한다. 자기의 이유로 선택한 길은 그나마 견디기 수월하다지만, 그 길이 쉽지 않은 건 매한가지다. 주어진 환경이 아무리 어려워도 자신의 태도를 결정하고 자기의 길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는 ‘나’에게 있어야 한다. 그 자유를 잊지 않는다면 주어진 삶도 선택한 삶도 얼마든지 경작할 수 있는 땅이 된다.
“보다 근본적인 것은 선인들이 갈고 닦은 표현양식과 기법, 그리고 미의식을 현대적으로 어떻게 수용하고 발전시켜 나가느냐 하는 것이지요.” (『혜화동 50년』, 1989)
“다시 흙으로 돌아가는 순리에 의해 하찮은 잡풀의 생애일지라도 보다 깊은 애정과 관심을 가지고 그것들을 어떻게 회화성으로 표현할 것인가 하는 것이 나의 과제이다.”(⌜이름없는 잡초에 애정을 느끼며⌟, 『동서문화』, 1997.8)
선택의 자유란 아무런 원인도 없이 내가 마음대로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나에게 주어진 것들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나만의 것으로 소화하는 과정이다. 이대원은 1957년 미국과 유럽의 미술 현장을 직접 경험했다. 돌아와서는 남들이 이미 만들어 놓은 서구 미술의 길을 따르기보다, 자신이 어떤 그림을 그릴 것인지 처음부터 다시 찾아보겠다고 다짐했다. ‘한국적인 현대 회화는 어떻게 가능한가’라는 질문을 평생 탐구했다.
이대원은 자수와 나전, 화각 등 전통 공예의 색과 빛, 동양화의 운필과 기법을 색점과 색선, 색면으로 풀어내며 자신만의 독자적인 회화 언어를 구축했다. 특히 이대원의 색점은 서양의 점묘법과 구분된다. 그의 색은 눈에서 섞여 사라지는 대신, 자수의 색실처럼 각자의 빛을 유지한 채 화면 안에 축적되고, 화면 전체에서 긴밀히 호응하여 화려하면서도 세련된 색채 구성을 이룬다.
평생 축적한 색과 빛의 언어는 말년의 대형 작품에서 만개한다. 『인왕산』, 『도리화』, 『사과나무』 등은 화면을 바라보는 풍경화가 아니라, 그 안으로 들어가 거닐게 하는 산수의 세계를 펼쳐 보인다. 대상을 표현하던 수단이었던 색점은, 이제 그 자체로 빛이 되었다. 그러니 이곳에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은 하나도 없다.
※ 본 글은 『혜화동 70년』, 『혜화동 50년』 (이대원), 전시 도록을 참고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