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의 <채식주의자> 초판 표지 그림은 에곤 실레의 <네 그루의 나무>다. 나무는 같은 수종으로 보이지만, 줄기와 가지는 물론 잎에 덮인 전체 모양도 제각각이다. 햇빛과 수분의 영향이 크고, 눈과 바람도 수형에 변화를 가져온다. 여기에 서 있는 위치와 순서에 따라 서로가 영향을 주고받았을 것이다. 사람도 나무도 고유형은 유전되지만, 그림의 배경처럼 변화무쌍한 환경에 적응하며 자신만의 길을 걷는다. 표지 그림으로 실레 작품을 고른 이는 한강 자신이다. 그렇다면 그림에서 자신을 가린 잎사귀를 거의 떨구고 정직하게 세상과 만나는 나무는 누구일까? 채식으로 ‘나무 되기’를 꿈꾸던 주인공 영혜일까? 한강 자신일까? 아니면 에곤 실레일까?
에곤 실레는 구스타프 클림트와 함께 20세기 비엔나 미술을 대표하는 화가다. 독특한 구도로 신체를 왜곡한 표현은 인간의 관능적 욕망과 실존에 대한 불안을 거친 윤곽선과 색채로 표현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눈에 보이는 세상을 사실적으로 그리는 것보다 차별과 폭력으로 일그러진 세상의 이면을 그리는 것이 실레가 찾은 진실이었다. 실레보다 스물여덟 살이 많았던 클림트는 실레의 드로잉을 보고서 뭐라고 표현할 수 없는 활력을 느꼈다. 사실보다 진실이 더 정직하다는 각성이 주는 힘이었다. 실레의 작품은 조형적으로 더 이상 새로울 게 없다고 느껴지던 미술 세계에 새로운 활기를 불어넣었다.
그리스 신화에 영혜의 ‘나무 되기’와 비슷한 장면이 나온다. 궁술의 신인 아폴론은 에로스의 작은 활을 우습게 여긴다. 활로 무서운 뱀 피톤을 죽여 자만에 빠진 아폴론에게 작은 고추는 그저 작은 고추일 뿐이다. 작은 고추가 맵다는 사실은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기분이 상한 에로스는 아폴론에게 금화살을 쏘고 예쁜 요정 다프네에게 납화살을 쏜다. 이렇게 아폴론은 쫓고 다프네는 도망치는 비극이 시작된다. 사랑의 날개를 단 아폴론의 손길을 피할 수 없었던 다프네는 아버지인 강의 신 페네이오스에게 도움을 청한다.
“저를 숨겨 주세요. 아니면 저의 모습을 나무로 바꿔주세요.”
아폴론의 교만이 에로스의 복수를 낳아 괜한 다프네만 불행하게 나무로 변해간다. 월계수로 변해가는 다프네가 너무나 사실적으로 묘사되어 가슴이 시려온다. 월계수로 반쯤 변한 다프네의 모습에 영혜의 힘겨운 ‘나무 되기’가 겹친다.
<채식주의자>의 주인공 영혜는 평생 고기를 즐겨 먹었다. 영혜는 어린 시절부터 가부장적인 아버지로부터 구타를 당하면서 자랐다. 결혼 생활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남편은 영혜를 정형화된 역할로 대했다. 브래지어를 불편해하는 영혜의 숨막힘을 살피려고 하지 않았고, 오히려 영혜의 과민함을 의아해했다. 어느 날 영혜는 꿈을 통해 동물을 타자화하고 육식으로 폭력을 행한 자신과 마주하게 된다. 주위에서 자신에게 행해지는 차별과 폭력은 영혜 자신이 어떻게 할 수 없기에 참는 것 외에 다른 방법이 없었다. 하지만 자기 안에 내면화된 폭력은 자신의 책임이었고, 스스로 버려야 했다. 영혜는 육식을 거부하고 채식주의자가 되기로 한다. 그 종점인 ‘나무 되기’는 우리에게는 비극적이지만, 영혜에게는 각성의 완성이다.
우리가 비극에서 아름다움(美), 즉 비극미를 떠올리는 이유는 ‘비극이야말로 우리를 통절하게 깨닫게 하기 때문’이다. 아폴론에게 각성이란 자신의 행위가 사랑이 아니라 폭력이었다는 깨달음이다. 하지만 현실은 다르다. 아폴론은 다프네를 영원히 잊지 않기 위해 월계수를 성수로 삼았고, 그 가지와 잎으로 월계관을 만들어 머리에 썼다. 수많은 비극을 양산하면서도 끝내 깨닫지 못하는 아폴론의 모습을 <채식주의자>에서 쉽게 찾을 수 있다. <채식주의자>에서 우리가 읽어야 할 것은 ‘나무 되기’를 갈망하는 영혜가 아니라, 우리 사회와 내 안에 숨겨진 폭력성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