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욱진, 가장 진지한 고백 [강태운의 빛과 그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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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욱진, 가장 진지한 고백 [강태운의 빛과 그림자]
  • 강태운 미술칼럼니스트
  • 승인 2023.09.25 15: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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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욱진은 흰 캔버스가 두려웠다. 작업을 시작할 즈음에는 항상 캔버스를 뒤집어 놓았다. 흰 캔버스는 장욱진에게 묻고 있었다. 물감을 바른다 하여 진지한 고백이 될 수 없을 터, 자기를 정직하게 드러낼 만큼 마음의 준비가 되었는가? 준엄한 물음 앞에서 장욱진은 흰 캔버스 위에 바로 그림을 그릴 수 없었다. ‘표현이 쉽고도 어려운 것은 자기를 내어놓는 고백이 되기 때문이다.’ 장욱진은 항상 바탕을 세운 후에 그림을 올렸다. 그림에 앞서 세상일이 그러했다. 바탕을 짓지 않으면 한 걸음도 나아갈 수 없었다. 모래성은 오래 가지 않았다. 일상의 토대가 있어야 삶을 영위할 수 있었고, 서로 믿음을 지은 이후에 관계를 쌓을 수 있었다.

먹고사는 일은 누구나 수월하지 않다. 밥벌이는 지겹고, 사는 일은 버겁다. 무슨 법칙이라도 되는 양 세상은 정돈보다 혼돈을 좋아하고, 삶은 다사다난(多事多難)해진다. 자신이 어디에 서 있는지 자주 놓치는 것이 범인(凡人)의 삶이다. 장욱진은 깨끗이 살려고 고집했다. 방법은 단순했다. ‘나는 심플하다.’ 하나에 집중해서 전체를 겨눠야 한다. 한 점을 겨눈 칼날의 서슬을 푸르게 세우면, 그 칼날로 닥쳐올 전체를 감당할 수 있다 믿었다. 그것만이 살길이었다. 장욱진에게 그 한 점은 그림이었다. 장욱진은 바탕을 그리면서 서슬 푸른 칼날처럼 그림을 그릴 준비가 되어 있는지 자신을 살폈다. 허술히 보고 있지는 않은지, 잡념이 섞여 있지는 않은지, 결과적으로 흰 캔버스를 감당할 만큼 순수한지를 자신에게 물었다.

'까치', 1958, 캔버스에 유화 물감, 40x31cm. /제공=국립현대미술관
'까치', 1958, 캔버스에 유화 물감, 40x31cm. /제공=국립현대미술관

평생 그림을 천직으로 여기는 사람들에게 화가라는 직업은 천행(天幸)과 같다. 어려서부터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을 분명히 알기 때문이다. 붓을 놓으면 아무것도 되지 못하기에 화가는 천형(天刑)에 비유된다. 천행과 천형은 종이 한 장 차이다. 어려서 장욱진은 그림을 그릴 때면 그렇게 신명이 났다. 신명은 바람 앞에 촛불처럼 자주 위태로웠다. 집에서는 화가를 천한 일로 여기는 분위기를 견뎌야 했다. 장욱진은 식구들이 잠든 후에 몰래 일어나 그림을 그렸다. 밖에서는 대상과 닮게 그려야 한다는 틀에 박힌 인식 때문에 다르게 그리면 틀리다 차별하는 세상과 싸워야 했다.

장욱진이 그림에 대한 신명을 지켰던 것은 안목 있는 주위 사람들의 격려 덕분이었다. 보통학교 일본인 미술 선생님이 장욱진의 그림 하나를 골라 출품한 미술대회에서 장욱진은 일등상을 받았다. 미술 성적은 갑상(甲上)으로 급상승했다. 무엇보다도 장욱진을 바라보는 주위의 시선이 달라졌다. 성홍열에 걸려 잠시 수양차 머문 수덕사에서 만난 서양화가 나혜석은 장욱진이 그린 그림을 칭찬하였고 장욱진은 고무됐다.

넓은 세상에 나가니 신명은 자주 깨졌다. 일제 치하에서 조선 백성들은 자신의 역사를 부정해야 했다. 장욱진은 배알이 꼬이는 일을 참아넘길 수 없었고 자주 싸웠다. 일본 대학에서 미술을 공부할 때 그림을 자기 멋대로 그린다고 지적받았고, 이는 일본 색이 담기지 않았다는 뜻이었다. 그럴수록 장욱진은 민족의식을 자각했고, 자신의 정체감을 단단히 인식했다. 이런 상황은 장욱진이 주위 시선이나 시류(時流)보다 자기 예술에 몰입하는 계기가 됐다.

장욱진은 저항 속에 살았고, 밥벌이의 지겨움 속에 살았고, 6·25 전쟁 속에 살았고, 무기력하게 술독에 빠져 살았다. 밤을 하얗게 새우고 아무런 변화 없이 맞는 새벽은 흰 캔버스와 다르지 않았다. 또 술이었다. 그렇게 폭주(暴酒)하여 자신을 다 소모해야 했다. 자신을 짓누르는 무력감까지 소진하고 싶었던 거다. 세상이 신명을 깨뜨릴 때마다 마시고 바라보는 이외에 아무 할 일이 없었다. 할 일 없이 바라보고 있으면 초가집, 나무, 새, 바위 그리고 거리의 선(線)이 눈에 들어왔다. 그렇게 선이 이어져 자신에게 닿으면 오늘은 무엇인가 그릴 수 있을 것 같은 마음에 신명이 충만했다.

그림을 그리고픈 신명은 아무리 의심해도 더 이상 의심할 수 없는 순수함 그 자체였다. 아무런 목적과 의도를 갖지 않았다. 그 신명만이 흰 캔버스의 준엄한 물음을 감당할 수 있을 터였다. ‘한 작가의 개성적인 발상과 방법만이 그림의 기준이 된다. … 개성적인 동시에 그것은 또한 보편성을 가진 것이 아니어서는 안 된다.’ 신명은 사람마다 다르기에 개성적이면서 동시에 인류의 보편적 정서와 맥을 같이 한다. 장욱진은 그림의 바탕 위에 신명을 올리고자 했다. 다만 신명이라는 내용을 담아낼 형식이 고민이었다. 내용이 형식을 잃어버리면 거칠고 형식이 내용을 담지 못하면 사치스럽다.

순수한 신명을 담는 형식이라면 공통된 규칙이나 문법에서 자유로워야 한다. 장욱진은 신명 났던 장면들을 떠올렸다. 농사나 명절에는 흥을 돋우기 위해 노래와 춤을 추었고, 술이 한 잔 들어가면 신명이 넘쳤다. 하지만 그 신명의 이면에는 풍년과 안녕 그리고 대동단결이라는 집단의 무의식을 깨우고자 하는 의도가 있었다. 장욱진이 좋아하는 술도 마찬가지였다. 술은 그 자체로 순수한 신명은 아니었다.

장욱진의 그림을 동심 가득하고, 작고, 예쁜 아동화 같다고 한다. 장욱진은 부산 피난 시절, 국립박물관에서 주관한 어린이 박물 학교에서 아이들에게 그림을 지도했다. 아이들은 한번 자기 생각에 집중하기 시작하면, 자기 안의 신명을 주체하지 못하고 발산한다. 들불처럼 주위로 번지면 가르치는 처지에서 곤란하기 그지없다. 차라리 기름을 부어 산화시켜 잠재우는 것도 방법이다. 막대기를 들고 마당에 낙서하는 아이들의 몸짓은 신명 그 자체였다.

장욱진 작품에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까치와 나무, 산과 달은 예나 지금이나 함께 길을 가는 동무다. 동무는 관찰해서 재현하는 대상이 아니라 사이좋은 풍경 같은 존재다. 어느 하나 어울리지 않은 게 없는 동무들 덕분에 제멋대로 자리 잡은 비현실적 구도와 배치는 두드러지지 않는다. 평생의 동무는 허리춤을 붙잡고 늘어진다고 생기는 것이 아니라 산, 까치, 달, 집, 나무처럼 무심하게 함께 한다. 무심하게 함께 한다는 것은 인간관계가 닿을 수 있는 궁극의 지점이다.

'자화상', 1973, 캔버스에 유화 물감, 27.5x22cm, 개인소장. /제공=국립현대미술관
'자화상', 1973, 캔버스에 유화 물감, 27.5x22cm, 개인소장. /제공=국립현대미술관

서구 모더니즘에는 공통된 규칙과 문법이 존재한다. 대상을 해체하여 분석하는 해석 방법이 그렇다. 장욱진만의 신명 나는 도식화·기호화 방식에서는 서구의 흔적을 찾아볼 수 없다. 장욱진만의 독창적인 모더니즘은 내용과 형식이 조화로운 종합적인 발상을 토대로 아이의 몸짓으로의 역변이(逆變異)를 추구했기 때문이다. 목적과 의도에서 벗어나 일종의 무심(無心)한 상태에서 자동기술 되듯이 그리기에 그의 작품은 ‘심플’이라는 모더니즘의 본질에 투철해 있다.

미술교육자 로웬펠트가 정의한 표현발달단계에 따르면 4세에서 7세까지를 구상주의적 기호의 초기 발달단계로 보았다. 특히 사람을 표현하는 기본 형태가 나타나는 시기다. 7세 이후로 구상주의적 기호는 지속적으로 발달하여 물건, 상태, 색에 대한 도식이 생기고 기저선을 사용한다. 9세 이후가 되면 공간의 깊이와 자연스러운 색을 표현하는 기술이 늘고, 점진적으로 비판적인 인식과 미적 표현의 정교함이 증가한다. 도식이라는 객관적 사고와 기저선이라는 공간의 개념에는 소통이라는 목적성이 내재 되어 있다. 자신의 신명에 집중해서 순수하게 그림을 그리는 시기는 대체로 7세 이전의 몸짓에서 찾을 수 있다.

장욱진의 청년기 작품들은 향토색이 짙게 느껴지는 일상의 주제들이 주를 이룬다. 장욱진은 장년기를 거치면서 자신만의 독창적인 발상과 방법을 탐색했다. 신명 나는 아동화적 도식화·기호화 과정이었고, 동화 같은 정경에 동심이 깃든 풍경 등이 그러했다. 이후 중년기에 이르면 마치 막대기를 손에 든 아이처럼 뼈대나 윤곽만으로 대상을 조형화시키며 기호화된 형태를 그렸다. 장욱진은 순진무구한 몸짓이 자기 안에 자연스럽게 체화되도록 자신을 작위(作爲)하였고, 그 형상들은 실존의 절대적인 형상으로 표현되었다.

'진진묘', 1970, 캔버스에 유화 물감, 33x24cm, 개인소장. /제공=국립현대미술관
'진진묘', 1970, 캔버스에 유화 물감, 33x24cm, 개인소장. /제공=국립현대미술관

<진진묘>의 주인공 이순경 여사는 1978년 지인과의 편지에 화가의 근황을 전하면서 ‘변화 속에서 안정하십니다.’라고 썼다. 그 말이 이상하다면서도, 곱씹으면 자기 능력을 가늠하기 좋은 잣대라고 덧붙였다. 장욱진에게 순수란 무(無)의 상태가 아니라 변화 속에서 안정을 유지하는 일이었다. 팽이가 변화의 정점에서 가장 꼿꼿이 서 있는 때를 일컬어 졸고 있다고 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장욱진은 깨끗하게 살려고 고집했다. ‘평생에 그림 그린 죄’밖에 없다고 강변했다. 죄마저 심플하게 표현했다. 심플은 천성이었을까. 숫돌에 몸을 갈듯 자신을 소모했다.

※ 본 글은 <江가의 아틀리에>(장욱진 지음), <장욱진 Catalogue Raisonne>(정영묵 지음), <그 사람 장욱진>(김형국), <아동미술>(이소은, 권기남 공저)을 참고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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