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격적인 첫 문장(궁금하면 찾아보시길)으로 시작하는 소설 <마션>의 작가 앤디 위어는 2021년 소설 <프로젝트 헤일메리>를 발표했다. 앤디 위어의 부친은 물리학자, 모친은 전기공학자라고 한다. 과학과 공학지식을 적극적으로 소설에 반영하는 작가의 작풍에 어려서의 집안 분위기가 영향을 미쳤을 것 같다. <마션>의 배경이 화성이라면 <프로젝트 헤일메리>의 배경은 태양계를 훌쩍 벗어난 우주다. 2015년에 제작되어 상업적으로도 큰 성공을 거둔 영화 <마션>을 재밌게 본 많은 이가 <프로젝트 헤일메리>가 영화로 제작된다는 소식을 몇 년 전 처음 듣고 크게 기뻐했다. 큰 기대를 갖고 고대하던 영화 <프로젝트 헤일메리>가 드디어 2026년 3월에 개봉했다. 일부 생략된 부분도 있지만 영화는 소설의 내용을 충실하게 묘사한다. 소설을 읽으며 머릿속으로 상상한 장면이 영화에서 멋지고 생생한 시각적 이미지로 표현되는 것이 정말 좋았다. 주로 소설의 내용을 중심으로 했다는 것을 염두에 두고 아래의 글을 읽기 바란다. 그리고 아직 영화를 보지 않았다면 읽기를 일단 멈추고 극장으로 빨리 달려가기를. 아래에서는 줄거리보다는 과학, 특히 물리학의 내용을 주로 설명하고자 했다.
소설 제목에 들어있는 ‘헤일메리’는 절망적인 상황에서 요행을 바라면서 적진 깊숙이 길게 공을 패스하는 것을 뜻하는 미식축구 용어다. 비슷한 상황에서의 농구 용어이기도 하다. 흥미롭게도 ‘헤일메리’는 천주교의 중요한 기도문 중 하나인 성모송의 앞부분이기도 하다. 영어로는 “Hail Mary, full of grace”로, 우리말로는 “은총이 가득하신 마리아님”으로 시작하는 기도문이다. 성모 마리아를 간절하게 부르는 기도문의 처음이 은총이나 요행을 바라며 무리한 공격 방법을 택하는 스포츠 용어 ‘헤일메리’의 유래인 셈이다. 기도문의 “Hail Mary”에 이어서 곧이어 등장하는 “grace”가 소설과 영화의 주인공 이름이라는 것도 재밌다. “Hail Mary, full of grace”를 읽으며 그레이스 혼자 전체 우주선을 사용하는 헤일메리호를 떠올릴 수도 있고, 멸망을 수십 년 앞둔 시점 간절한 마음을 담아 우주 공간으로 보낸 헤일메리호에 신의 은총이 가득 충만하게 깃들기를 바란다는 의미를 생각할 수도 있다.
소설은 “2 더하기 2는 무엇입니까?”로 시작한다. 답을 모르는 사람은 하나도 없는 단순한 질문을 묻는 이유가 궁금하지 않은가. <마션>처럼 <프로젝트 헤일메리>도 첫 문장부터 궁금증을 불러일으켜 독자의 관심을 붙잡는다. 일종의 혼수상태에서 깨어난 주인공은 아직 어지러운 머리로 자신이 지금 어디에 있고 자신이 과연 누구인지 알아내려 애쓴다. “난 누구? 여긴 어디?”의 답을 찾아가는 과정이 딱 과학자의 사고방식을 닮아서 무척 재밌게 소설의 앞부분을 읽었다.
깨어난 장소에서 사다리를 이용해 위로 오르는 주인공은 사다리의 길이가 10피트 정도라는 것을 자연스럽게 떠올린다. 길이의 국제 표준 단위인 미터를 이용한 3미터가 아니라 왜 10피트를 떠올렸을까? 미국, 영국, 라이베리아 등 극소수의 몇 나라에서만 여전히 국제 표준이 아닌 피트를 단위로 사용한다는 것을 기억한 주인공은 또 뉴욕에서 LA까지의 거리를 스스로 묻고 그 답으로 약 3000마일이라는 거리를 떠올린다. 피트와 마일이 미터와 킬로미터보다 먼저 떠오른 이유를 생각한 주인공은 자신이 미국인이라는 것을 거의 확신하게 된다. 게다가 라이베리아에서는 국제 표준인 미터를 사용하지 않는다는 것을 너무나 자연스럽게 떠올리는 것을 보면서, 자신은 분명 과학에 관련된 직업을 가진 사람이라고 추론한다. 사다리를 통해서 위로 올라가 실험실 공간에 들어선 주인공은 주사형 전자 현미경, 레이저 간섭기 등의 전문적인 과학 장비를 한눈에 알아본다. 이것도 자신이 미국 과학자가 틀림없다는 결론의 신빙성을 높인다. 그리고 조금씩 기억이 돌아오면서 자신이 학교에서 과학을 가르치는 교사인 그레이스 박사라는 것을 명확히 기억해 낸다.
“난 누구?”에 이어서 주인공 그레이스는 “여긴 어디?”를 묻는다. 줄자와 스톱워치를 이용해서 0.91m 높이에서 떨어뜨린 물체의 낙하 시간을 20회 반복 측정하고 평균을 구해 0.348초라는 결과를 얻는다. 우리나라 중학교와 고등학교 물리학 수업에서 자유낙하 운동을 배운다. 물체의 낙하 거리(h)와 낙하에 걸린 시간(t)을 알면 식 h = ½gt²을 이용해 중력가속도(g)를 계산할 수 있다. 그레이스는 자신이 있는 공간의 중력가속도가 지구 표면 근처에서의 값인 우리가 익숙한 9.8m/s²의 약 1.5배라는 결론을 얻는다. 그렇다면 지구 표면 근처에 정지한 밀폐된 공간 안에 자신이 있는 것일 리 없다.
아인슈타인 일반상대성이론의 가장 근본적인 가정은 중력이 관성력이라는 것이다. 내가 지금 앉아 있는 이 방이 지구의 중력장(g)안에서 정지해 있는 것인지, 아니면 방 밖은 아무것도 없는 무중력 공간인데 누군가가 내 방 위에 케이블을 매달아 g라는 가속도로 위로 휙 잡아당기고 있는지, 둘 중 무엇이 실제 상황인지 방 내부의 정보만을 이용해 알아내는 것은 원칙적으로 불가능하다는 얘기다. 물체의 자유낙하 실험으로 가속도를 알아낸 그레이스는 어쩌면 자신이 있는 공간 전체가 무중력 공간에서 빙글빙글 회전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생각한다. 만약 맞다면 회전축으로부터의 거리가 멀수록 원심력에 의한 가속도(a)가 거리(r)에 비례해 더 커지게 된다. (회전 각속도가 ω인 경우 a=rω²로 a는 r에 비례한다.) 자신이 깨어난 침실 공간과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 들어간 실험실 공간 모두 아래쪽으로 중력이 작용한다. 따라서 실험실 위 방향 어느 위치엔가에 원운동의 중심이 있어야만 한다. 그레이스는 4.5m의 높이차가 있는 침실과 실험실 공간에서 이번에는 진자를 이용한 실험을 진행해서 두 곳의 진자 주기가 일치한다는 결과를 얻는다. 회전축으로부터의 거리가 각각 r과 r-4.5인 두 장소에서 진행한 진자 실험인데도 진자의 주기가 같다면 1.5g의 가속도가 원운동에 의한 원심력으로 만들어졌다는 가설을 완전히 기각할 수 있을까? 소설에서는 이 부분에서의 그레이스의 생각이 명확히 설명되어 있지는 않다. 하지만 만약 r이 아주 큰 값이라면 r과 r-4.5의 상대적인 차이가 워낙 작아서 유의미한 진자 주기의 차이가 관찰되지 않을 수 있다. 정규분포를 가정한 통계학을 이용해 대충 어림하면 (r-4.5)/r의 값이 0.997보다 커야 한다는 얘기가 가능하고 따라서 r이 1500m이상이라는 결과를 얻게 된다(소설에서 소개된 1280m와 그리 다르지 않은 추정이다). 즉, 만약 그레이스가 타고 있는 시설물이 주변에 아무런 천체가 없는 무중력 공간에서 빙글빙글 원운동하고 있는 것이라면 이 일종의 우주선의 길이는 1500m 이상이어야 한다는 합리적인 결론을 얻게 된다. 그레이스는 인류가 아직 이렇게까지 큰 우주선을 만든 적이 없다는 것을 기억해 내어서 이 가정을 기각한다. 자신이 깨어난 이 장소는 우주 공간에서 원운동하는 우주선이 아니다.
지금까지의 추론 결과를 요약해보자. 자유낙하운동과 원운동의 물리학, 그리고 통계학의 지식을 함께 이용한 그레이스는 자신이 있는 곳이 지구 표면 근처의 정지한 공간이라는 가설을 먼저 기각하고, 이어서 텅 빈 우주 공간에서 원운동을 하고 있다는 가설도 기각한다. 다음에 생각해 볼 수 있는 가설이 아직 남아있다. 지구 표면 근처에 있는 것은 맞지만, 정지한 것이 아니라 회전하는 공간이라는 가정을 생각할 수 있다. 물체를 매단 줄의 한쪽 끝을 손에 쥐고 중력장 안에서 줄을 가만히 늘어뜨린 다음 손을 조금씩 돌리면 물체가 지면에 평행한 원운동을 하며 빙글빙글 돌게 된다. 이때 줄이 시간이 지나면서 휩쓸고 지나가는 면은 바로 원뿔의 표면이 된다. 물리학에서는 이런 장치를 원뿔진자라고 부른다. 그레이스가 내부에 있는 이 설비가 지구의 지표면 근처에서 원뿔진자처럼 운동하고 있다면 물체에 작용하는 전체 가속도는 중력가속도와 원운동의 가속도가 함께 기여해서 만들어진다. 지구의 중력가속도가 기여하는 부분이 있으니 원운동의 가속도가 앞에서 생각한 무중력 우주 공간에서의 원운동 가속도보다 작아도 전체 1.5g의 일정한 가속도를 만들어내는 것이 가능하다. 결국, 앞에서 소개한 텅 빈 우주 공간의 원운동과 비교하면 설비의 길이가 절반 정도로 줄어도 1.5g의 가속도를 구현할 수 있다. 원뿔의 꼭지점으로부터 약 700미터 거리에서 자신이 있는 공간이 원운동하고 있다는 가설을 그레이스가 이런 방식으로 추론한 것으로 보인다. (사실 소설에 주어진 정보만을 이용해서 원운동의 회전 반경과 회전 각속도를 모두 구할 수는 없고, 소설에는 자세한 설명이 누락되어 있다.) 하지만 문제는 이렇게 힘들게 1.5g의 가속도로 움직이는 내부 공간을 가진 거대한 설비를 지표면 근처에 만들고, 그 안에 침실과 실험실을 설치한 다음 빠르게 원뿔진자 운동을 구현할 아무런 이유를 찾기 어렵다는 것이다. 이런 설비가 도대체 무슨 쓸모가 있겠는가 말이다. 결국 그레이스는 자신이 있는 곳이 지표면 근처의 정지한 설치물 내부도 아니며 우주 공간이든 지표면 근처이든 빙글빙글 원운동하는 설비 내부일 리도 없다는 결론을 얻는다.
이어서 그레이스는 통제실의 화면에 표시된 우주선 속도가 66초당 1km/s의 비율로 줄어들어서 1.5g의 가속도에 해당한다는 것을 알아낸다. 따라서 자신은 직선을 따라서 1.5g의 가속도로 움직이는 우주선 안에 있다는 확실한 결론을 얻는다. 그레이스는 또 우주선 주변 항성 표면의 흑점을 제어실 화면으로 보면서 스톱워치를 이용해 이 항성의 자전 주기가 2일 정도라는 것도 알아낸다. 우리가 매일 보는 태양의 자전 주기인 25일과는 큰 차이가 나는 주기다. 결국 그레이스는 태양이 아닌 다른 항성 근처에서 1.5g의 가속도로 움직이는 우주선 안에 있다는 명확한 결론을 얻게 된다. 자신이 있는 곳이 어디인지, 주인공 그레이스가 합리적으로 그리고 단계적으로 추론하는 사고의 과정은 과학이 실제로 진행되는 과정을 무척 닮았다. “불가능한 모든 것을 제거하고 나면, 아무리 가능성이 낮더라도 남은 것이 진실일 수밖에 없다.” 아서 코난 도일의 소설에서 셜록 홈즈가 한 말도 떠오른다. 하나하나 가능성을 생각하고 각각을 실험과 관찰과 논리적인 추론을 통해 반증하고 검증하면서 점점 더 명확한 결론에 다가선 그레이스의 사고방식이 바로 과학의 방식이다.
소설에서 태양의 출력 에너지를 감소시키는 외계 미생물이 아스트로파지다. 별을 뜻하는 ‘아스트로’와 박테리아를 숙주로 삼아 번식하는 바이러스인 박테리오파지의 ‘파지’를 결합한 단어다. 즉, 아스트로파지는 별을 숙주로 삼아 번식하는 생명이라는 뜻이다. 아스트로파지는 자신이 있는 곳에서 가장 밝은 주변 항성으로 이동하고 그곳에서 자신 내부에 에너지를 저장한 후 충분한 이산화탄소가 있는 주변 행성을 향해 이동한다. 이 행성에 도착한 아스트로파지는 그곳에서 개체수를 늘려 증식하고 항성을 향해 다시 이동하게 된다. 이 전체 과정을 반복하면서 기하급수적으로 개체수가 늘어난 아스트로파지는 항성의 에너지 출력을 빠르게 차단하게 된다. 아스트로파지가 이동할 때 이용하는 것이 바로 광자의 운동량이다. 항성으로 갈 때와 행성으로 갈 때 특정한 파장을 가진 적외선 빛을 내뿜으며 아스트로파지는 엄청난 속도로 이동한다. 지구의 과학자들은 태양 주변의 여러 별들이 이미 아스트로파지에 감염되어 점점 밖으로 방출하는 에너지가 감소하고 있는 것을 알게 되는데, 예외인 별이 하나 있다. 바로 고래자리의 타우별, 타우세티다. 아스트로파지의 방출선이 있는데도 타우세티의 밝기는 줄지 않고 있다. 그렇다면 아스트로파지가 기하급수적으로 개체수를 늘리는 것이 타우세티에서는 불가능하다는 얘기다. 그 비밀을 알아내려 지구인이 타우세티로 보낸 것이 바로 그레이스가 탑승한 우주선 헤일메리호다.
타우세티 부근에서 그레이스는 외계 우주선을 발견하고 외계 생명인 로키와 소통과 협력을 시작한다. 40에리다니라고 불리는 실제 존재하는 삼중성계의 한 행성 40에리다니Ab가 로키의 고향 행성이다. 실제 존재하는 이 행성은 <스타트렉>에서는 벌칸족의 고향 행성이기도 하다. 소설에서 그레이스는 이 행성을 에리드, 이곳의 지적 생명종을 에리디언이라 부른다. 암모니아가 주성분인 에리드 행성의 대기는 무려 29기압의 압력에 무려 210도의 온도이며, 중력은 지구의 약 2배 정도다. 두터운 대기층으로 말미암아 에리드 행성의 표면은 완벽한 어둠이고, 이곳에서 진화한 에리디언은 눈이 없어 시각이 아니라 주로 청각으로 외부 정보를 파악한다. 에리디언의 발화 언어는 마치 고래의 발성과 비슷해 보인다. 우리가 5개의 손가락으로 피아노의 5개 건반을 동시에 누를 수 있듯이, 에리디언들은 한 번에 5개의 진동수를 가진 다섯 음정을 동시에 소리로 발성하고 청각으로 인식할 수 있다. 만약 이들이 구분할 수 있는 소리의 진동수가 19개라면 짧은 시간 이어지는 다섯 개 음정을 가진 소리로 표현할 수 있는 정보의 가짓수는 얼마일까? 19개에서 5개를 순서와 무관하게 뽑는 경우의 수와 같아서 1만을 넘는다. 바로 영어 원어민이 구사하는 어휘의 숫자가 이 정도다. 놀랍지 않은가? 5개의 진동수가 함께 어우러진 일종의 짧은 휘파람 소리 하나로 에리디언은 상당한 양의 정보를 축약해 표현할 수 있다.
다섯 개의 다리가 있는 에리디언의 손가락은 세 개다. 손가락이 다섯이어서 우리가 10진법에 익숙하듯, 손가락이 셋인 에리디언은 6진법의 수체계를 이용한다. 우리 인간의 0, 1, 2, 3, 4, 5에 각각 해당하는 에리디언의 숫자 기호가 이다. 소설의 서른 개의 장(chapter)은 01부터 29까지는 우리가 익숙한 십진법으로 장의 번호가 적혀있지만 마지막 30장의 제목은 이다. 그레이스가 드디어 에리디언의 언어에 통달했다는 의미일 수도 있고, 30장의 얘기가 펼쳐지는 장소가 에리드 행성이라는 것을 뜻하는 것일 수도 있다. 위에 적은 에리디언의 6진법 표기법을 이용해서 이 바로 우리의 30을 표기하는 기호라는 것을 확인해 보기를.
소설에서 소개하는 에리디언의 생리학은 정말 재밌다. 이들 몸의 근육은 부피가 변할 수 있는 일종의 스펀지 같은 소재의 주머니로 이루어져 있는데 주머니의 수축과 팽창에 물의 액화와 기화를 이용한다. 수은으로 이루어진 에리디언 체내의 혈액은 두 종류가 있다. 환경성 혈액은 대기 온도와 같은 210도, 열성 혈액은 이보다 높은 온도인 305도이다. 에리드의 대기압인 29기압 환경에서 물은 210도에서는 액체, 305도에서는 기체 상태라는 것을 인터넷에서 물의 상그림(phase diagram)을 찾아보고 확인했다. 이를 이용하면 에리디언의 근육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이해할 수 있다. 근육을 이루는 주머니를 둘러싸고 환경성 혈액이 흐르면 주머니 안 물의 온도가 210도가 되어 물은 액체가 된다. 기체보다 액체가 부피가 훨씬 작으니 주머니의 부피가 줄고 에리디언의 근육이 수축한다. 한편 주머니 주위에 305도인 열성 혈액이 흐르면 주머니 내부의 물은 29기압 환경에서도 기체로 변해서 주머니 부피가 늘어나 에리디언의 근육은 팽창하게 된다. 에리디언의 근육은 주머니 주위에 환경성 혈액과 열성 혈액을 번갈아 흘리면서 수축하고 팽창한다. 눈치챘는지? 바로 이렇게 물을 끓여 수증기로 바꿔 작동하는 것이 증기기관이다. 에리디언의 몸은 증기기관이다.
증기기관을 반복해 작동시키려면 다시 온도를 낮추는 것이 필요하다. 에리디언은 액체 상태인 암모니아가 기체 상태로 변하면서 흡수하는 열에너지를 냉각에 이용하는데 냉매로 이용되는 암모니아는 혈액에 유입되는 것이 아니라 별도의 폐쇄계를 따라 흐른다. 암모니아를 냉매로 이용한 냉각과정이 끝나고 나면 이제 암모니아는 기체 상태가 된다. 이를 액체 상태로 되돌려야 다시 반복적으로 냉매로 이용할 수 있다. 이때 높은 압력을 이용하게 되는데 이렇게 압축하는 과정에서는 열에너지가 밖으로 방출되게 된다. 우리가 사용하는 냉장고와 에어컨의 방열 장치에서 일어나는 일이 정확히 같다. 냉장고의 냉매는 먼저 액체 상태로 파이프를 통해 냉장고 내부에 유입된다. 냉장고 안에서 음식물에서 열에너지를 빼앗아 온도가 높아진 냉매는 기체 상태가 되어 냉장고 밖의 방열기 부분에 도달하는데, 이곳에서는 전기 모터가 만들어내는 압력을 이용해 기체로 변한 냉매를 다시 액체로 바꾼다. 이 과정에서 열에너지가 밖으로 방출되어서 방열기 부분은 뜨끈뜨끈 온도가 높아진다. 결국 기체 암모니아를 다시 액체로 바꿔야 하는 에리디언의 몸도 방열 장치가 꼭 필요하다. 바로 에리디언의 등딱지가 방열기의 역할을 한다. 에리디언의 몸이 증기기관처럼 작동하려면 냉장고 같은 냉각기도 함께 지녀야 한다. 증기기관에 해당하는 에리디언 몸의 근육은 물의 상변화를 이용하고, 냉각기에 해당하는 에리디언의 등딱지는 암모니아의 상변화를 이용한다. 두 과정에서 물과 암모니아는 외부에서 주입되지도, 외부로 방출되지도 않는다. 에리디언의 몸은 일종의 폐쇄계로 작동하는 셈이다. 현실에서 얼마나 구현이 가능한지는 잘 모르겠지만 작가가 설명하는 에리디언 몸의 작동 방식은 과학적이면서도 무척이나 흥미롭다.
지금까지 소설에 그려진 내용에 관련된 과학, 특히 물리학의 내용을 설명했다. 과학에 관련된 구체적인 내용은 아니지만 책에는 정말 흥미로운 질문이 여럿 등장한다. 지구인과 에리디언의 과학 수준을 직접 비교하기는 어렵지만, 그래도 소통이 가능할 정도로 비슷한 수준인 이유는 무엇일까? 지구인과 에리디언이 청각에 이용하는 가청주파수 대역이 겹치는 이유는 무엇일까? 둘이 생각을 진행하는 속도가 어느 정도 비슷한 이유가 두 행성 표면의 중력가속도의 크기가 크게 다르지 않기 때문일까? 소설은 또, 지구와 에리드라는 확연히 다른 환경에서 진화한 두 생명종의 개체인 그레이스와 로키가 각각 자신의 종 전체를 위해 기꺼이 희생하고자 하는 것이 어떻게 가능한지 묻는다. 소설에서 작가가 위의 질문에 어떻게 답했는지, 그리고 독자는 어떻게 답할지 생각해 보시길.
소설과 영화는 상당히 감동적이기도 하다. 로키와 헤어진 그레이스는 헤일메리호를 타고 지구를 향해 나아간다. 이때 헤일메리호에서 아스트로파지의 포식자인 타우메바가 제노나이트 용기를 탈출해 아스트로파지를 먹어버린 사건이 발생한다. 그레이스는 이 문제를 가까스로 해결해 충분히 남아있는 아스트로파지를 연료로 이용하며 지구로의 여행을 계속할 수 있다. 하지만 로키는 어떨까? 그레이스는 걱정스러운 마음으로 로키의 우주선을 찾아보지만 실패한다. 로키의 우주선은 아스트로파지의 방출광이 없다. 타우메바가 로키 우주선의 제노나이트 연료통에 침입해서 그곳의 아스트로파지를 모두 먹어 치웠음에 분명하다. 로키는 이미 우주의 미아가 된 상황이다. 로키를 걱정하며 눈을 지그시 감은 그레이스가 떠올린 것은 “로키의 바보같은 등딱지와 언제나 뭔가를 만지작거리고 있는 그의 작은 팔들뿐”이다. 이 짧은 표현을 소설에서 읽고 눈물을 글썽였다. 그레이스는 이 상황에서 어떤 선택을 했을까? 궁금하면 소설과 영화를 보시길.
*책을 읽고 함께 이야기 나눌 주제
1. 에리디언과 인간의 과학 수준이 크게 차이 나지 않는 이유를 로키는 어떻게 설명하나요? 비슷한 논리로 지적 외계인이 지구를 찾아오지 않는 이유를 설명할 수 있을까요?
2. 그레이스는 과학 인간, 로키는 고치는 에리디언입니다. 과학과 공학의 차이는 어떤 것일까요? 소설처럼 둘 사이의 협력이 놀라운 성과를 만들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3. 행성에서 먹이 사슬의 최상위에 있는 생명이 사고를 진행하는 속도가 그 행성의 중력가속도와 관련될 수 있다는 재밌는 아이디어가 소설에 등장합니다. 동의하나요?
4. 지구와 에리드의 생명이 같은 기원을 가질 수 있을까요?
5. 에리디언 개체는 집단지성을 구현하는 단위라고 할 수 있어요. 에리디언 개체가 집단지성 혹은 집단의식을 인식할 수 있을까요? 연결을 통해 인류가 이미 집단의식을 만들어냈지만 우리가 아직 눈치채지 못하고 있다고 할 수도 있을까요?
6. 생명 진화에는 다양성이 늘어날 뿐 딱히 정해진 방향이 없습니다. 과학과 기술의 발전도 그럴까요? 외계의 지적 존재의 과학과 인류의 과학을 비교해 우열을 얘기할 수 있을까요?
7. 책을 읽고 영화를 보면서 로키가 참 귀엽다는 생각을 했어요. 좀 끔찍하게 생긴 로키가 귀엽다고 느껴지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우리가 긍정적인 감정을 느끼는 대상은 어떤 공통점을 갖나요?
8. 그레이스는 초인적 의지를 가진 뛰어난 인간이 아니라 죽기 싫어 중요한 임무에서 벗어나려한 평범한 인간입니다. 작가는 왜 그레이스를 이런 사람으로 묘사했을까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