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들리는 트럼프, 어쩔 수가 없다 [김경훈의 시네노믹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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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들리는 트럼프, 어쩔 수가 없다 [김경훈의 시네노믹스]
  • 김경훈 칼럼니스트
  • 승인 2025.10.13 1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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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어쩔 수가 없다’, 미국이 동요하다
영화 ‘어쩔 수가 없다’의 한 장면. /사진=CJ ENM
영화 ‘어쩔 수가 없다’의 한 장면. /사진=CJ ENM

세기를 달리해서 해고의 자유가 좀 더 일반화되었던 데에는 이른바 ’리얼타임‘이라는 시간으로부터의 해방이 있었다. 금융자본의 폭주는 은폐된 공황 속에서 자본의 한계 효율을 더욱 탐닉할 수 있었고, 산업과 노동은 뱁새 걸음걸이로 쫓아갈 수밖에 없었다.

허겁지겁 구조조정과 리엔지니어링은 상시적인 일과가 되어버렸다. 오직 대량생산과 대중매체만이 키치적 취향을 장마철 관개수로 위에 빗물이 흘러넘치듯 소비하게 했고 또한 그것을 여가로 착각하게 만들었다.

이 현시적 소비가 사회의 연대를 무너뜨리고 있다는 주장은 논란의 여지가 있지만, 프라이버시가 제한되는 공적 인사들의 자기만족과 과시는, 주택수당을 올려놓고 의사당 안에서 어깨춤을 추는 인도네시아 국회의원들처럼, SNS에 끊임없이 자신들의 소비 행태를 떠벌리던 네팔의 장관들처럼 공동체 사회를 갉아먹는 일임은 분명하다.

영화 <어쩔 수가 없다>에는 옛 식민지 국가의 지배 이데올로기나 그 잔존 세력(매판자본가나 부역자들의 후예)이 움켜쥐고 있는 부서진 환상 같은 것이 나열된다. 극 중 만수와 미리가 포카혼타스나 나폴레옹 복장을 하고 춤추고 있는 모습이 그렇다. 이들은 런던에 가면 꼭 황금마차를 탄다. 그러다 포브스지의 국력 순위를 보게 되면 당황해하며 애써 외면한다.

냉전 이후 폭력적으로 진행됐던 세계화의 여파로 미국에서는 마가(MAGA)가 출현했지만, 이머징 국가들에서 날아오른 임금 노동자를 비롯한 쁘띠부르주아지들의 허위의식도 마찬가지로 기묘하게 전도되어 있었다. 사실 이들 마가나 신흥국가들의 객체화된 시민계급의 출현은 반복적이다.

영국의 산업혁명이 미국에서 전신이나 철도로 꽃피듯이 20세기 후반의 정보혁명이 21세기 초반 마침내 AI 혁명으로 다시 한번 시공간을 압축하고 있다. 자본과 노동의 격차는 이 두 번째 파동에서 극대화하고 기술혁신은 기존의 선호 구조와 분배 양식을 무너뜨린다.

수세기에 걸친 과학기술 혁명은 전생의 업(業)인 신분을 혁파하고 현생의 업인 계급을 파괴해 왔다고 돌이켜 볼 수 있지만, 인간 사회의 갈등은 칡과 등나무의 뒤엉킴과 DNA의 나선형 구조가 그런 것처럼 진보에 대한 확신만 가지고 쉽게 벗어던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어쩔 수가 없다>처럼 범죄를 다룬 영화를 접할 때 관객들은 인과관계에 민감해진다. 인과율과 시시비비는 다른 것이지만 어쩔 수가 없다. 도덕과 윤리의 기반은 대부분 인과와 연기(緣起)에 의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만수가 최후의 승자가 되어 늦은 밤, 텅 빈 공장에 남아 기계와 같이 우왕좌왕하는 모습은 그가 근로 소비 대중이라기보다는 기계로부터 소외된 무력한 개인임을 확인해 줄 뿐이다.

소비욕이 지배하는 사회는 역설적으로 소비행위에 내재하는 효용이라는 주관적인 합리성마저도 팽개칠 때 내파(implosion)를 입고 붕괴하지만, 무르익은 소비사회에서 개개인들은 멈출 수가 없다. 먼저 무너진다. 세 번에 걸친 살인은 마침내 연쇄살인마 같은 숙련도를 보여주는데, 그가 얻은 것은 공허이다.

박찬욱의 스타일리시는 화면에 얼룩으로 남아 있지만, 배우들의 연기는 첫 번째 살인에서 드러났던 어리숙함, 서툰 살의, 모든 것을 멈추고 원래대로 돌아갈 것 같은 망설임, 어쨌든 제3자에 의한 살인 등으로 환상 가로지르기에 도달하게 된다.

영화 ‘어쩔 수가 없다’의 한 장면. /사진=CJ ENM
영화 ‘어쩔 수가 없다’의 한 장면. /사진=CJ ENM

어느덧 만수의 위치에 우리를 기입하게 만들더라도 대부분 관객은 그의 남은 삶을 추적해 보지 않을 것이다. 의붓아들의 불안한 시선, 같은 짐을 짊어진 것 같은 배우자의 체념, 그리고 무언가 탈피한 듯한 어린 딸의 천부적 재능마저도 결코 이 가족에게 행복의 조짐으로 읽히지 않는다.

결국 우리 평범한 개인들은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로 귀의하게 된다. 어쩔 수가 없다. 충분히 지혜로운 사람들은 욕망을 소비 욕구 따위와 대체하지 않는다. 몸과 의식을 불태우면서 도달할 수 있는 절정은 자아와 타자의 시선 속에서 피드백 되고 마침내 ’재‘(ash)가 되기 때문이다.

일체유심조의 존재론과 ’일즉일체 일체즉일‘(一卽一切 一切卽一)의 인식론이 빈틈없이 조화를 이루고 있는 불교의 관념을 형상화한 영화 3편을 꼽으라고 하면, 늘 주저함 없이 ▲배용균의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 ▲임권택의 <만다라> ▲김기덕의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이 떠오른다. 김기덕의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의 촬영지는 경북 청송의 주산지인데, 연못 아래 나무가 잠겨있는 형세를 나타내는 괘는 이른바 ‘택풍대과’(澤風大過) 괘이다.

능력과 계획에 어울리지 않게 2번째 찾아온 임기를 무위로 만들고 있는 트럼프에 대한 직관을 주는 택풍대과 괘를 관통하는 한마디는 ‘동요’(棟橈)이다. 트럼프의 미국은 크게 흔들릴 것이다. 동요할 것이다. 대들보나 용마루가 휘어져 있다면, 그 건물 아래 아무도 서 있고 싶어 하지 않을 것이다. ‘합중국주의’라는 용마루를 떠받치고 있는 것은 견제와 균형이다. 이 긴장감은 모든 영역에서 관철되는데 국가기관 사이, 연방정부와 주정부 사이, 양당제를 둘러싼 산업 사이, 복음주의 개신교와 유대교 등 종교 사이, WASP(White Anglo-Saxon Protestant, 백인 앵글로-색슨 개신교도)와 소수민족 사이, 그리고 정부와 자본 사이 등등 이 균형이 대들보가 되어 합중국주의를 유지하고 분열을 막는다.

보통 미국과 중국에서 패러다임의 변화로 창궐하는 혁신 기업들 가운데 주도적인 기업이 자연선택 되는 과정에는 자본시장과 관료조직이 작동하는데, 이 단계에서 발생하는 자본의 팽창과 수축이 두려운 기업가들은 사력을 다한다. 그런데 케인즈 이후 수정자본주의 국가라는 이미지를 희석하기 위해서 나름대로 애써온 미국에서 대통령 일가가 플레이어로 뛰어든 것이다.

이 모순보다 좀 더 본질적인 움직임은 대통령 일가가 지닌 특별한 권력(하이브리드, 수정자본주의)마저도 시장에서 정화 혹은 청산될 것이라는 자신감과 그 자신감에서 비롯된 자본과 기업들의 반격이 기필코 이루어질 것이라는 데 있다. 따지고 보면 대공황도 이러한 시장 청산의 일종이라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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