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억!” 김창열은 갑자기 소리를 질렀다. 내장 깊숙이 고여 있던 무엇이 한순간 터져 나온 듯한 외마디 비명이었다. 그것은 굴곡 많은 길의 끝에서 닳아 뭉개진 소리였고, 동시에 억눌린 울분이 막힌 숨구멍을 뚫고 나오는 소리였다. 일상을 찢은 비명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어두운 여운을 남긴 채 입언저리부터 진물처럼 흘러내렸다. 정작 그의 주위는 평온했다. 끔찍한 사건도 없었고, 몸에는 아무런 고통도 없었다. 비명은 과거의 어떤 지점에서 역류하여 시간의 장막을 찢고 나오는 것 같았다. 소리치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마치 짐승처럼.
그의 내면을 불시에 덮친 것은 전쟁의 기억이었다. 미아리 고개를 넘는데, 사방에 시체가 널브러져 있었다. 탱크가 지나간 자리에 바람 빠진 럭비공 같은 사람 머리가 뒹굴었다. 차마 비명도 지르지도 못하고 숨이 끊어진 사람들. 나오지 못한 비명은 남은 사람의 몫이었을까. 아니었다. 목숨 붙은 자는 놀랄 틈도, 비명 지를 정신도 없었다. 비명은 입 밖으로 터져 나오지 못한 채 몸속에 쌓였다. 비명을 삼킨 채 서둘러 그곳을 떠났지만, 참혹한 장면은 평생 가슴속에 각인되었다.
전쟁은 끝났지만, 내면의 전쟁은 멈추지 않았다. 열다섯 살 김창열은 혼자 38선을 넘어 남하했다. 날은 어두웠고, 기관총 소리가 간간이 들려왔다. 러시아 군대의 삼엄한 경계를 뚫으려면 목숨을 걸어야 했다. 그 순간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신을 찾았다. “신이시여, 당신이 계신다면 제발 도와주소서.” 국군에 징집되었을 때는 이북 출신이라는 이유로 총부리 앞에 서기도 했다. 처형 직전, 젊은 청년을 연민한 마을 사람들이 그를 살려냈다. 같이 행군하던 전우 여럿이 폭사하였고, 총알이 귓가를 스치는 일을 여러 번 겪었다. 중학교 동창 절반이 죽었다. 죽음은 가까이 있었지만, 그를 비껴갔다.
참혹한 기억을 붙들고 살아야 하는 것이 살아남은 자의 운명이다. 비명은 평온한 일상을 인정하지 않는다. 어둠 속에 낮게 웅크린 고양이처럼 느슨해진 삶의 틈을 노리고 튀어나온다. 제때 나오지 못했던 울분을 다 털어버리려는 심산인 모양이다. 찢긴 일상의 파편 위에 망각 속으로 사라졌던 기억이 눈앞에 생생하게 살아난다. 이제는 기억이 비명을 부르는 것인지, 비명이 기억을 떠올리게 하는 것인지 알 수가 없다. “어억!” 그 옛날 날카로웠을 비명에 세월의 흔적이 묻어난다.
김창열의 예술 세계는 바로 그 억눌린 비명에서 출발했다. 비명은 붓질로 옮겨졌고, 물감의 질감으로 변주되었다. 1950년대 후반 그는 ‘현대미술가협회’를 주도하며, 서구에서 유입된 앵포르멜을 한국의 상황에 새롭게 접목하려는 실험을 이끌었다. 김창열에게 앵포르멜은 단순한 양식이 아니라, 총알 자국과 탱크의 흔적처럼 전쟁의 고통스러운 절규를 화면에 메우는 행위였고, 죽음을 위로하는 제의(祭儀)와도 같았다. 그래서 그는 작품에 ‘제사’라는 제목을 붙였다. 이 시기는 그의 예술 세계에서 상처를 형상화하는 중요한 시작점이 되었다.
1965년, 그는 김환기의 권유로 록펠러 재단의 지원을 받아 뉴욕으로 건너갔다. 하지만 뉴욕은 냉정했다. 한국에서 그가 꾸준히 그려온 앵포르멜 회화는 뉴욕에서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했다. 당시 미국은 자기 고백적인 앵포르멜 시대가 저물고, 시대의 단면을 가감 없이 드러내는 팝아트 같은 포스트모던이 떠오르고 있었다. 고통마저 소비하는 정서적 이질감은 김창열에게 큰 소외감과 회의를 안겼다. 그러나 바로 그 단절이 새로운 전환을 낳았다. 두텁고 거친 질감은 사라지고, 매끈하고 정제된 화면에 차가운 기하학적 형태가 등장하기 시작한다. 화면에는 착시를 일으키는 원근감과 함께, 색띠 안에 구형의 형체가 배치되고, 응축된 내적 에너지가 외부로 팽창하는 듯한 이미지가 반복되었다.
1969년, 그는 뉴욕에서 겪은 단절된 듯한 삶을 뒤로하고 파리로 거처를 옮긴다. 이 시기 제작된 '현상' 연작은 이전의 차가운 기하학적 형태가 녹아내리듯 흐르는 유기적 형상으로 바뀌고, 응집된 덩어리는 마치 인체의 장기처럼 점액질로 표현되었다. 김창열은 이 시기의 작업을 ‘창자 미술’이라 부르며, 신체성, 물질성, 추상과 재현 사이의 경계를 탐색했다. 이 시기의 실험은 곧이어 등장하는 '물방울' 회화의 전조로, 그의 예술 세계를 이끄는 중요한 이정표가 된다.
1971년, 김창열은 마침내 물방울과 조우한다. 캔버스를 재사용하기 위해 뿌려둔 물이 우연히 맺히는 순간, 그는 충만한 형태의 세계를 보았다. 그것은 단순한 우연이 아니었다. 전쟁의 기억, 앵포르멜의 절규, 창자 미술의 실험을 거쳐 도달한 필연의 결과였다. 김창열이 붙든 것은 ‘물’이 아니라 ‘물방울’이었다. 물이 끝없이 흘러 만물을 감싸는 보편적 존재라면, 물방울은 개별의 아픔을 증언하며 독립적으로 존재한다. 각각의 방울은 눈물처럼 작지만, 그 안에는 기억과 비명, 삶과 죽음, 멈춰 선 시간의 무게가 응축되어 있다. 물방울은 위태롭고 언제 사라질지 모르는 듯 보이지만, 화면 위에서 온전한 존재로 고유의 시간을 살아간다.
김창열의 물방울은 사실적이면서도 실재와 환영 사이의 경계를 넘나든다. 물방울은 단순한 시각적 이미지가 아니라 개인의 경험, 생존의 흔적, 전쟁과 망명 속에서 살아남은 기억이 압축된 작은 그릇이다. 반복되는 점 하나하나가 모여, 화면 전체를 통해 삶의 고통과 치유, 기억과 존재의 가능성을 드러낸다. 김창열의 물방울은 이렇게 단순한 재현을 넘어, 개별의 아픔과 생(生)을 붙잡는 조형 언어로 자리 잡았다.
김창열은 벽장을 정리하던 중 발견한 Le Figaro의 오래된 호를 수채화 용지로 사용했다. 처칠의 전쟁 회고록이 실린 1949년 2월 4일 자 지면이었다. 지면과 처칠 캐리커처 안에 물방울 몇 개를 그려 넣었다. 죽음은 어디에도 있었다. 김창열은 하얀 캔버스만 고집할 수 없었다. 초기에는 에어스프레이 기법으로 그려진 물방울이 거친 생지, 신문지, 모래, 나무 같은 바탕 위에 놓이기 시작했다. 자신만의 시간을 가지며 온전히 자신을 추스른 물방울은 드디어 시선을 바깥으로 돌린다. 물에 내재한 보편적 속성을 따라, 바탕을 적시는 존재로 승화한다. 1970년대 후반에는 물방울의 얼룩 자국이 등장했으며, 1980년대에는 회화적인 표현과 콜라주 등 다양한 변화를 시도했다.
1980년대 중반, 김창열은 화면에 문자를 도입했다. 신문지 위에 물방울을 그리며 글자와 이미지의 관계에 눈뜬 그는, 곧 천자문을 끌어왔다. 천자문은 단순한 교육 교재가 아니라, 자연과 우주의 질서를 담아낸 기호였다. 반복적으로 쓰인 글자 위에 맺힌 물방울은 세계를 이해하려는 노력과 함께, 존재의 덧없음을 보여주었다. 특히 ‘회귀’ 연작은 문자와 물방울의 만남을 통해 상처를 봉합하는 진혼의 붓질이자, 존재에 대한 근원적 질문을 담았다.
노년에 이르러 물방울은 더 이상 반복되는 이미지가 아니라, 삶과 예술을 함께 살아가는 동반자가 되었다. 문자와 물방울이 만난 화면은 곧 사라질 운명을 지닌 인간의 삶을 압축한 장이 되었고, 김창열은 그 속에서 자신의 미학을 완성했다. 그의 물방울은 단순한 시각적 장치가 아니라, 기억과 상처, 삶과 죽음을 동시에 품은 존재론적 언어였다.
※ 김창열 회고전은 국립현대미술관 서울에서 12월 21일까지 열린다. 본 글은 『물방울 그리는 남자』(김오안), 『Tschang Yeul Kim』(Cohen, Ronny) 및 전시 보도자료를 참고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