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란 가을 하늘 [김범준의 세상물정]
상태바
파란 가을 하늘 [김범준의 세상물정]
  • 김범준 편집위원(성균관대 교수)
  • 승인 2021.10.29 10:29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사진=픽사베이
/사진=픽사베이

이제 가을이다. 파란 가을 하늘, 울긋불긋 아름답게 물든 단풍, 덥지도 춥지도 않은 딱 적당한 기온. 난 가을이 참 좋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 달리는 기차 안에서 바라본 차창 밖 가을 풍경을 즐긴다. 하늘이 나 좋으라고 멋진 색을 보여주는 것도 아니고, 나뭇잎이 내 눈에 아름다우라고 예쁘게 물 드는 것도 아니다.

매년 이맘때 날씨가 선선해지는 것도 더운 여름에 지친 나를 자연이 위로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우리나라 주변 가을날 기압 배치가 푸르른 가을 하늘을 만들고, 가지고 있는 물의 양을 줄여 추운 겨울을 견뎌야 하는 나무는 미리 가을에 잎을 떨군다. 가지에서 잎이 떨어지기 전 잠깐 예쁜 단풍을 보여줄 뿐이다.

계절이 바뀌어 선선한 가을이 오는 것도 공전궤도면에 대해 수직방향에서 약간 옆으로 기운 지구 자전축 덕분일 뿐이다. 이 모든 것을 과학으로 이해해 자연의 변화가 나를 위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다고 해서, 아름다운 가을날 차창 밖 풍경에서 느끼는 내 감탄의 정도가 줄어드는 것은 결코 아니다. 난 과학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가 아닌 그래서 더욱, 난 가을이 정말 좋다.

아름다운 가을 날 차창 밖 멋진 풍경을 보며 과학자인 나도 다른 모든 이와 마찬가지로 감탄한다. 자연의 아름다움에는 알아야 더 감탄할 수 있는 것이 많다. 과학은 이성이라는 날카로운 칼날로 아름다운 무지개를 풀어헤쳐 훼손하지 않는다. 과학자도 사람의 부분집합일 뿐이어서 무지개의 아름다움에 모든 사람과 마찬가지로 똑같이 감탄한다.

과학이 가진 놀라운 힘은 눈에 직접 보이지 않는 자연의 다른 아름다움에 대한 깨달음으로 우리를 이끌 수 있다는 것이다. 무지개를 보며 파장마다 다른 빛의 굴절률로 나의 생각을 이어가다가, 무지개를 만들어내는 물방울의 빛의 투과율을 인터넷에서 검색해본다. 가시광선영역에서 물이 빛을 잘 투과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그래프를 찾고는 고개를 끄덕인다. 아하, 그래서 물방울이 투명해보이고 빛을 잘 투과해 무지개를 만드는 것이구나!

넓디넓은 전자기파 전체의 파장 영역에서 왜 우리 인간은 좁디좁은 가시광선 영역대의 빛에 특히 민감한 시각을 가져 멋진 무지개를 볼 수 있을까, 궁금증이 이어진다. 그리고는, 해가 지구에 보내주는 고마운 복사 에너지가 가시광선 영역에서 가장 큰 에너지를 가진다는 사실을 떠올리며 고개를 끄덕인다. 과학의 눈으로 무지개를 보는 사람은 무지개의 멋진 모습에 다른 모든 이와 똑같이 감탄하면서, 동시에 지구 생명을 가능케 한 물과 태양의 고마움을 떠올린다. 멋진 무지개를 감상할 수 있는 인간의 눈으로 이어진 긴 진화 과정에 경이감을 느낀다.

/사진=픽사베이
/사진=픽사베이

지구가 형성된 초기에 멀리서 다가온 혜성이 지구에 물을 가져다준 것이라는 과학의 발견까지 생각이 이어진다. 아름다운 무지개를 보며, 우주를 떠돌던 원자에서 나라는 존재로 이어진 긴 관계의 사슬에 놓인 모든 매듭의 소중함에, 내가 무지개와 깊이 연결되어 있다는 깨달음에 전율한다. 이런 사실을 알아낸 과학과 인간 이성의 아름다움에도 말이다. 어떤 아름다움은 알아야 더 잘 보인다.

영어로 가을 하늘의 색을 말 할 때는 녹색(green)이 아니라 파란(blue) 하늘이라고 한다. 한편 우리나라 사람들은 가을 하늘을 푸르다고도, 파랗다고도 말한다. 나뭇잎은 푸르다고 하지 파랗다 하지 않고, 보행자 신호등은 분명히 녹색인데 또 파란 등이라 부르기도 한다. 잠깐 우리말의 몇 예를 떠올려보니 무척 재밌다. 최근 학술지 <Scientific Reports>에 출판된 ‘Environment and culture shape both the colour lexicon and the genetics of colour perception’이라는 제목의 연구가 있다. 지구 위 여러 곳에 존재하는 142개 인구 집단에 대해 각 지역의 여러 특성에 관련된 데이터를 모았다.

주변에 커다란 호수가 있는지, 그 지역의 일조량은 어떤지, 또 인구 집단의 크기는 어떤지, 여러 다양한 요인과 그 지역 언어가 ‘푸름’과 ‘파랑’을 명확히 구별하는지 통계적인 방법으로 살펴봤다. 논문의 결과가 흥미롭다. 먼저, 일조량이 많은 지역의 언어는 푸름과 파랑을 굳이 구별하지 않는 경향이 있다. 오랜 시간 강한 햇빛에 노출되면 사람들의 시각인식은 푸른색과 파란색을 명확히 구별하기 어렵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뿐 아니다. 논문 저자들은 주변에 큰 호수가 있는 지역, 그리고 인구가 많은 집단의 언어는 푸름과 파랑을 구별하는 경향이 있다는 결과도 얻었다. 인구가 많으면 기술의 발달도 빨라 더 다양한 색을 만들어내는 염료기술이 발전했을 것이라 가정하면, 염료기술이 발달할수록 푸름과 파랑을 구별하는 경향이 있다는 그럴 듯한 결과다. 사람의 언어가 기후, 환경, 그리고 문화에 의해서 영향을 받을 수 있다는 주장을 담은 멋진 연구다.

우리말에서 파란 가을 하늘을 푸르다고도 하는 것이 우리나라의 기후조건과 관련이 있을 수 있다는 얘기가 무척 재밌다. 햇빛이 강해 눈부신 가을 하늘을 보며, 우리가 푸른 하늘과 파란 하늘을 함께 말하는 이유다.

멋진 가을 하늘 빛에도 과학이 할 수 있는 얘기가 무궁무진하다. 파랗고 푸른 가을 하늘을 다시 올려 본다. 알고 본다고 해서 하늘이 덜 멋져 보이는 것이 결코 아니다. 아니, 난 거꾸로다. 알고 보니 더 예쁘다. 과학은 무지개를 풀어 헤치지 않는다. 무지개의 색을 생생히 드러내 더 아름답게 보이게 한다. 난 여전히 가을날 하늘을 보며 등골이 오싹한 경이로움을 느낀다. 과학자임에도 불구하고가 아니라, 과학자라서 더욱.

 


관련기사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