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2억 재산’ 고위공직자, ‘100억대 빌딩’ 누락 [사자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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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2억 재산’ 고위공직자, ‘100억대 빌딩’ 누락 [사자경제]
  • 이광희 기자
  • 승인 2021.08.27 1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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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자경제] 각주구검(刻舟求劍). 강물에 빠뜨린 칼을 뱃전에 새겨 찾는다는 어리석고 융통성이 없음을 뜻하는 사자성어입니다. 경제는 타이밍입니다. 각주구검의 어리석음을 되풀이하지 않게 경제 이슈마다 네 글자로 짚어봅니다.

27일 100여명이 넘는 고위공직자의 재산이 공개된 가운데 재산을 등록할 때 직계 존·비속의 재산을 숨기지 못하도록 관련 규정을 없애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사진은 기사내용과 무관.
27일 100여명이 넘는 고위공직자의 재산이 공개된 가운데 재산을 등록할 때 직계 존·비속의 재산을 숨기지 못하도록 관련 규정을 없애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사진은 기사내용과 무관.

“문민정부 개혁법안 제1호가 탄생했다.”

제14대 대통령 취임 석 달이 조금 모자란 1993년 5월 20일. 여야는 밤샘 협상 끝에 합의한 <공직자윤리법 개정안>을 만장일치로 통과시킵니다. 161번째 임시국회 마지막 날, 극적으로 타결한 것입니다. 이에 따라 1급 이상 고위공직자는 재산을 낱낱이 공개해야 합니다. 이어 같은 해 7월 12일, 김영삼 대통령은 총무처에 1호로 재산을 등록합니다.

‘재산공개’. 고위공직자와 배우자 및 공직자 직계 존·비속의 재산을 온 국민이 볼 수 있도록 널리 알리는 것을 일컫는 네 글자입니다. 윤희숙 국민의힘 의원 부친의 부동산 매입 의혹으로 정치권이 시끄러운 가운데 100명이 넘는 고위공직자의 재산이 공개됐습니다. 특히 재산 공개자 가운데 수백억원대를 신고하면서 100억원이 넘는 빌딩을 누락해 논란이 일고 있습니다.

정부공직자윤리위원회는 27일 관보를 통해 5월 2일부터 6월 1일까지 임용되거나 퇴직한 전·현직 고위공직자 110명의 재산을 공개했습니다. 가장 눈에 띄는 이는 모두 252억여원의 재산을 신고한 이종인 국무총리비서실 공보실장입니다. 6월 1일 임명된 이 실장은 배우자 명의의 경남 창원시 아파트를 2억4000만원으로 신고했습니다.

또 배우자 보유 예금(323억5000여만원)과 본인 보유 예금(5억8000여만원), 배우자 보유 토지 2필지 등을 신고했습니다. 신고 재산에는 배우자의 채무(82억8000여만원)도 포함했습니다. 300억원이 넘는 예금에 대해 이 실장은 “서울 서초구에 아내 명의로 소유한 토지를 신탁한 것이 예금 자산으로 분류됐다”라고 설명했습니다.

채무는 “서울 강남구에 배우자 명의로 소유한 빌딩을 지을 때 빌린 것”이라고 해명했으나 빌딩은 이번에 공개된 재산 내역에서 빠뜨렸습니다. 해당 빌딩은 서울 강남구 청담역 인근 6층 규모로 가액이 100억원대로 추정됩니다. 이 실장은 이와 함께 부부 공동 명의인 10억원 가액의 서울 종로구 빌라도 재산 내역에서 누락했습니다.

고위공직자 재산공개 대상과 공개 시기. /자료=인사혁신처
고위공직자 재산공개 대상과 공개 시기. /자료=인사혁신처

이 실장은 “인사 검증 때는 재산 내역을 빠짐없이 제출했는데 이 자료를 윤리위원회에 다시 내는 과정에서 일부가 누락됐다”라며 “이유를 막론하고 송구스럽다. 추후 조사 때 성실히 소명하겠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면서 고위공직자 1주택 방침에 따라 창원 아파트는 최근 팔았다고 밝혔습니다.

인사처에 따르면 공직자 재산등록 사항은 신고한 내역 그대로 공개됩니다. 이후 공직자윤리위원회가 최대 6개월간 공개 대상자에 대해 전원심사를 진행합니다. 인사처 관계자는 이 실장의 재신 신고 누락에 대해 “최대 6개월 안에 의혹이 있거나 소명 요구 등을 통해 답변이 오면 윤리위에서 경위나 금액 등을 종합 판단해 징계 여부 등을 결정할 것”이라고 전했습니다.

이 실장은 현대제철 경영기획본부장(전무)과 삼표그룹 부사장, 민간 싱크탱크인 여시재 부원장, 국회 국민통합위원회 경제분과 위원 등을 지냈습니다. 이어 김부겸 국무총리가 취임한 뒤 총리실 공보실장으로 발탁됐습니다. 앞서 2016년 총선거에서는 대전 유성갑에서 더불어민주당 예비후보로 출마하기도 했습니다.

이밖에 이날 재산공개에서 김부겸 국무총리는 15억4000여만원, 박수현 대통령국민소통수석비서관은 3억4000여만원을 신고한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퇴직자 가운데는 김종갑 전 한국전력 사장이 177억3266만원으로 가장 많은 재산을 보유했습니다. 또 최기영 전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장관은 129억454만원을 신고해 눈길을 끌었습니다.

지난해 10월 29일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이 ‘국무총리실 소속 전·현직 고위공직자들의 부동산재산 실태’를 발표하며 정부에 입장을 촉구하고 있다. /사진=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
지난해 10월 29일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이 ‘국무총리실 소속 전·현직 고위공직자들의 부동산재산 실태’를 발표하며 정부에 입장을 촉구하고 있다. /사진=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

한편 고위공직자가 재산을 공개할 때 직계 존·비속의 재산을 숨기지 못하도록 관련 규정을 없애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습니다. 공직자윤리법 12조의 ‘부양받지 않는 직계 존비속은 고지를 거부할 수 있다’라는 규정입니다. 올해 3월 터진 LH 투기의혹 사태에서 보듯 재산공개 대상자가 부모나 자녀를 통해 부정하게 부를 축적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지난 3월 25일 입법·사법·행정부가 공개한 고위공직자 재산공개 내역을 보면, 행정부 고위공직자들의 ‘고지 거부’ 비율은 34.2%였습니다. 공개대상 1885명 가운데 644명이 부모나 자녀 재산을 공개하지 않은 것입니다. 2019년 27.4%, 지난해 29.9%와 견줘 보면 올해 들어 비율이 더 높아졌습니다. 입법부와 사법부로 시선을 돌리면 고지 거부 비율은 쑥 올라갑니다.

입법부인 국회의원의 경우 전체 300명 가운데 109명(36.3%)이 부모나 자녀의 재산을 공개하지 않았습니다. 직계 존·비속 162명 중 114명은 독립 생계유지를 이유로, 17명은 다른 사람이 부양한다는 이유였습니다. 국회의원들의 고지 거부율은 2019년 39.4%, 지난해 41.6%였습니다. 최근 3년 가장 낮은 수치이지만 여전히 높습니다.

법을 누구보다도 잘 지켜야 할 사법부로 가면 놀라울 따름입니다. 재산공개 고지 거부율이 절반을 훨씬 넘어서기 때문입니다. 고위 법관 144명 가운데 무려 80명(55.6%)이 직계 존·비속의 재산공개를 거부한 것입니다. 이들이 고지 거부한 부모나 자녀는 모두 114명입니다. 헌법재판소 역시 13명 가운데 50%가 넘는 7명이 가족 일부 재산의 공개를 거부했습니다.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의 김성달 부동산건설개혁본부 국장은 “우리나라 사람들의 재산관리방식은 가족단위 소유 개념이 일반적이라 고지 거부로 인한 사각지대가 만들어질 수밖에 없다”라며 “고지 거부 제도를 없애지 못하겠다면 비공개 등록을 하도록 해 공직자윤리위원회 등에서 재산형성 과정을 살펴볼 수 있어야 한다”라고 주장합니다.

지강헌을 소재로 한 영화 ‘홀리데이’의 인질극 장면. /사진=현진시네마
지강헌을 소재로 한 영화 ‘홀리데이’의 인질극 장면. /사진=현진시네마

“난 국민학교밖에 못 나왔는데, XXX들아, 이 사회에 적응하기 위해 인생을 버렸단 말이야”. 1988년 10월 16일, 권총을 든 인질범의 외침입니다. 이해할 수 없는 법원의 판결에 대한 분노가 수백억원을 횡령한 전직 대통령의 동생이 풀려나면서 극에 달한 것입니다. “유전무죄 무전유죄”를 남긴 인질범은 <Holiday>를 들으며 영원한 휴가를 떠났습니다.

“이 총은 누구도 뺏을 수 없는 내 마지막 재산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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