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아름답고 위대한 ‘마리안느와 마가렛’ [영화와 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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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아름답고 위대한 ‘마리안느와 마가렛’ [영화와 경제]
  • 김경훈 칼럼니스트
  • 승인 2021.08.02 09: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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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4년작 프랑스 영화  ‘나의 청춘 마리안느’의 한 장면. 사진=네이버 영화정보
1954년작 프랑스 영화  ‘나의 청춘 마리안느’의 한 장면. 사진=네이버 영화정보

중학교에 다닐 무렵인가 이런저런 호기심에 사로잡혀 햇빛 쏟아지는 들판에서 점프하던 시절, 여전히 발목에는 모래주머니 2개가 매달려 있었다.

지드의 <좁은 문>과 어느 날 TV 흑백화면에 그대로 사로잡혔던 <나의 청춘 마리안느>, 애욕에 대한 강박과 환상은 청춘의 기표가 되었다.

연애가 반복될수록 강박은 희미해졌고 실연은 사실상 제스처에 불과했지만, 뱅상이 오래된 성으로 다시 찾아갔을 때 이미 자취를 감춘 마리안느의 초상은 불멸하는 청춘의 얼룩이었다.

그녀는 대체 어디로 사라진 것일까? 어렸을 때는 뱅상이 키우던 사슴이 마리안느의 현신이라고 생각했지만, 삼십여 년이 지나 소록도의 마리안느와 마가렛의 이야기를 전해 들었을 때 비로소 애욕은 말발굽을 멈추고 고요해졌다.

환상은 더 이상 욕망의 뿌리처럼 깊어지지 않았고 달아나지도 않았다. 그들은 여기에 왔었고 다시 그곳으로 갔다.

대부분의 종교가 힘을 기울이는 영성의 최고조는 낮은 데로 임해서 성실과 정념을 교직한 탑을 높게 쌓았다가 이윽고 다시 떠나가는 것이지만, 현실 속에서 그러한 삶을 살아간 사람이 있을 줄은 몰랐다. 놀라운 일이었다.

다큐멘터리 영화 주인공 마리안느(왼쪽)와 마가렛. /사진=팝엔터테인먼트
다큐멘터리 영화 주인공 마리안느(왼쪽)와 마가렛. /사진=팝엔터테인먼트

경제학에서 전제하는 기본적인 인간형은 지적이고 이기적이지만, 후생경제학에서는 가끔씩 이타성이 스며든 경제이론을 전개하기도 하는데 아마르티아 센이 있다.

이기심과 이타심의 변증법적 관계는 개인수준과 사회수준에서 각각 다르게 작동할 수밖에 없고 집단 의사결정에서 개인의 이기심을 공동체 전체의 이해와 안정적으로 일치시키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시장은 장기적으로 균형을 찾아간다.

하지만 전쟁이나 기근, 팬데믹 같은 상황에서는 이타심이 발현될 수 있도록 교육하고 내적 역량(capability)을 키워온 공동체만이 사회적 선택을 받는다.

마리안느와 마가렛이 40여 년간 주민들과 함께 극복한 것은 굶주림, 열악한 주거환경, 방치된 의료보건, 전체주의적 우생학에서 호도된 불임시술, 교육의 박탈 등이다. 그렇게 주민들은 소록도에서 공동체를 구성했고 아이를 낳았다.

마리안느와 마가렛은 종신서원을 한 간호사로서 20대에 소록도에 와서 70대에 오스트리아로 돌아갔다. 그 이타성은 불가해한 것이었지만 그들은 무엇을 해야 하고 무엇을 하지 말아야 할지 정확히 알고 있었다. 설령 그들에게 위임했던 신이 직접 실행하더라도 더 잘할 수 없을 만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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