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레이드 러너’가 묻는다, 인간은 무엇이냐고 [김범준의 세상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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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레이드 러너’가 묻는다, 인간은 무엇이냐고 [김범준의 세상물정]
  • 김범준 편집위원(성균관대 교수)
  • 승인 2021.07.27 09: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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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2년에 만든 영화 ‘블레이드 러너’의 한 장면.
1982년에 만든 영화 ‘블레이드 러너’의 한 장면.

요즘 SF영화에 대한 토론 모임을 하고 있다. 내가 고른 다섯 영화는 <컨택트(Arrival)>, <매트릭스1>, <블레이드 러너>, <인터스텔라>, 그리고 <허(Her)>이다. 모두 내가 무척 좋아하는 SF영화다. 내가 좋아하는 영화는 공통점이 있다. 답하기 보다는 묻는 영화, 나로 하여금 곰곰이 오래 고민에 빠지게 하는 의미 있는 질문을 담은 영화가 난 참 좋다.

<블레이드 러너>는 유명 작가 필립 K. 딕의 1968년 SF소설 <안드로이드는 전기양을 꿈꾸는가?>(Do Androids Dream of Electric Sheep?)를 영화로 만든 작품이다. 2017년 개봉한 속편 <블레이드 러너 2049>도 물론 멋진 영화지만, 난 1982년 개봉한 첫 영화가 더 좋다. 우리나라의 여러 저자가 함께 집필한 책 <블레이드 러너 깊이 읽기>도 올해 출판되었다. 만들어진 지 무려 40년 가까이 지났는데도, 영화의 의미를 성찰하는 책이 여전히 출판되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블레이드 러너>가 우리에게 미친 영향의 크기를 짐작할 수 있다.

원작 소설에는 블레이드 러너(blade runner)라는 단어가 등장하지 않는다. 탈출한 인간형 로봇 안드로이드(영화에서는 인간 복제의 의미를 강조하려 레플리칸트라고 부른다)를 잡아 죽이는 사람을 소설에서는 대신 현상금 사냥꾼(bounty hunter)이라고 부른다. 영화 제목 블레이드 러너는 안드로이드를 살해하는 칼(blade)을 놀리는(run) 사람이라는 단순한 의미로 볼 수 있다. 혹은, 면도칼로 얇게 자르면 없던 경계를 만들어 하나를 둘로 가를 수 있다는 것을 떠올리면, 인간과 안드로이드 사이에 날카로운 경계를 설정하는 사람, 혹은 그 날카로운 구분의 칼날 위를 아슬아슬 위태롭게 달리는 사람이라는 의미일 수도 있다.

원작 소설과 영화를 같은 잣대로 비교할 수는 없다. 사진 비평가인 김현호가 책 <블레이드 러너 깊이 읽기>에서 “영화는 소설이 몸을 바꾼 것이라기보다는, 차라리 소설의 어떤 부분을 찢고 튀어나오는 존재”라고 했듯이 말이다. 소설에서 찢고 나올 부분을 어쩔 수 없이 취사선택할 수밖에 없는 것이 영화지만, 그래도 주인공 데카드가 기르는 소설의 ‘전기양’이 영화에 등장하지 않는 것은 좀 아쉽다. 실제 생명체가 아닌 전기양을 기르던 데카드는, 안드로이드를 살해(영화의 표현으로는 ‘은퇴시켜’)해서 받은 현상금 3000달러를 살아있는 산양 구매 계약금으로 몽땅 써버린다. 영화를 재밌게 본 사람이라면 원작 소설도 읽어보시길.

영화에서 레플리칸트를 판별하는 식별법이 바로 보이트-캄프 테스트다. 소설에서는 보그트 테스트라고 부른다. 인간이라면 누구에게나, 감정을 격동시켜 무의식적인 신체 반응을 일으킬 것이 분명한 질문을 하고는, 피부 모세혈관 혈류량의 변화를 뺨에 붙인 미세 전극으로 측정하고, 눈동자 동공의 확장을 눈 주변 미세 근육의 수축 정도로 관찰한다. 무의식적 감정 반응에 큰 변화가 없으면 테스트를 통과하지 못한 셈이다. 인간이 아닌 안드로이드일 가능성이 크다.

‘블레이드 러너’는 필립 K. 딕의 1968년 SF소설 ‘안드로이드는 전기양을 꿈꾸는가’(Do Androids Dream of Electric Sheep)를 영화로 만든 작품이다. /사진=스토아철학(하와이쿨1111) SNS
‘블레이드 러너’는 필립 K. 딕의 1968년 SF소설 ‘안드로이드는 전기양을 꿈꾸는가’(Do Androids Dream of Electric Sheep)를 영화로 만든 작품이다. /사진=스토아철학(하와이쿨1111) SNS

많은 이가 영화의 보이트-캄프 테스트를 보면서 유명한 튜링 테스트를 떠올렸으리라. 질문과 답변으로 이어진 대화를 서로 이어가면서, 인간 대화자가 대화의 상대를 인간으로 간주하게 되는지를 살피는 것이 튜링 테스트다. 대화에서 주고받는 말과 글만을 정성적 판단의 근거로 삼는 튜링 테스트를 더 정교하게 정량화한 미래의 버전이 영화의 보이트-캄프 테스트라고 할 수 있다.

영화에서 데카드는 레플리칸트 레이첼에게 ‘푹 삶은 개(boiled dog)’를 얘기하며 감정 반응을 살핀다. 감정 변화가 측정되지 않는 레이첼을 보면서 데카드는 그녀가 사람이 아닌 레플리칸트라는 확신을 점점 갖게 된다. 이 장면이 무척 재밌었다. 요즘은 아니지만, 이 영화가 개봉한 즈음에는 우리나라에 개고기 먹는 사람이 지천이었다. 당시의 한국인을 대상으로 했다면, 우리나라 사람 가운데 많은 이가 인간이 아닌 레플리칸트로 판정받았을 수도 있다.

소설에는 또, 살아 움직이는 새우 요리도 감정 반응을 야기하는 질문으로 등장한다. 살아서 꿈틀대는 새우를 보면 싱싱하다고 입맛을 다시는 것이 우리 한국인이다. 인간 모두의 당연한 감정반응이라고 질문자가 믿는 것들이 얼마나 강하게 사회문화적 환경의 지배를 받는지 명확히 보여준다. 영화의 보이트-캄프 테스트, 소설의 보그트 테스트가 안드로이드를 높은 확실성으로 구별해내기는 어려워 보인다. 인간과 안드로이드를 명쾌히 딱 잘라 둘로 나눠 구분할 수 있는 마법의 칼날은 과연 있는 걸까.

<블레이드 러너>가 내게 묻는 중요한 질문이 바로, ‘인간이란 무엇인가’였다. 수많은 안드로이드가 인간과 함께 살아가는 먼 미래에, 과연 우리는 극도로 발달한 안드로이드와 인간을 구별할 수 있을까? 영화는 반복해 관객에게 묻는다. 실제 현실 인간의 기억을 복제한 것일 뿐이지만, 어려서의 추억이 자신의 진정한 기억이라고 확신하는 레이첼을 보여주며, ‘추억과 기억’이 인간만의 특징이냐고 묻는다. 죽음의 순간, 눈물을 흘리는 레플리칸트 댄서 조라의 얼굴을 짧게 보여주며, 감정이 인간만의 고유한 특성인지를 묻는다.

영화의 레플리칸트 댄서 조라는 소설에서는 안드로이드 오페라 가수 루바 라후트에 대응한다. 엄청난 예술성을 가진 목소리로 노래하는 루바는 미술관에서 화가 뭉크의 그림을 감상하다 데카드에게 체포된다. 인간의 예술적 감각이 정말로 인간 고유의 것인지를 묻는 장면이다. 또, 레플리칸트 프리스는 영화에서 철학자 데카르트의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를 인용하며 자신도 인간과 마찬가지로 실재하는 존재임을 주장한다. 사고와 이성이 정말 인간의 영원한 독점적 전유물인지를 고민하게 하는 대사다.

영화에서 많은 이가 명장면으로 꼽을, 탈출 레플리칸트들의 리더 로이의 독백 “빗속의 눈물(tears in rain)” 앞뒤의 장면은 한술 더 뜬다. 미리 설정된 생존 기간의 막바지에 도달해 점점 굳어가는 손바닥을 못으로 뚫는 장면, 그리고 로이의 죽음 직후 흰색 비둘기가 하늘로 높이 날아오르는 장면은 누가 봐도 명백한 은유적인 종교적 상징이다. 과연 ‘영혼’도 인간의 전유물인지를 묻는 장면으로 나는 읽었다.

영화가 내게 묻는다. 인간은 과연 무엇이냐고. 인간처럼 기억하고 사고하며, 인간처럼 예술을 향유하는, 인간이 아닌 존재를 우리가 상상할 수 있다면, 인간은 과연 어떤 존재냐고 말이다. 또, 영화는 내게, 인간이 어떤 존재인지를 아직 잘 모르는 우리 인간이 다른 인간을 같은 인간으로 받아들이는 기적은 어떻게 가능하냐고 묻는다. 영화가 내게 묻는 질문은 계속 이어진다. 당신은 내가 인간임을 어떻게 아냐고, 아니, 스스로 내가 인간임을 확신하고 있는 나의 확신은 도대체 어떤 근거를 가지냐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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