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트릭스가 묻는 내 마음 속 ‘가시’ [김범준의 세상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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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트릭스가 묻는 내 마음 속 ‘가시’ [김범준의 세상물정]
  • 김범준 편집위원(성균관대 교수)
  • 승인 2021.06.28 15: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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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매트릭스'의 한 장면.
영화 '매트릭스'의 한 장면.

요즘 SF 영화를 보고 함께 얘기를 나누는 모임을 하고 있다. 지난 모임 주제의 영화가 <매트릭스1>이었다. 영화가 개봉한 1999년 당시 난 외국에 있었다. 영어 스트레스가 심할 때였다. 영어 공부도 할 겸 자막을 껐다 켰다 하며 여러 번 정말 재밌게 본 영화다. 입으로 꼭꼭 씹어 한 글자 한 글자 내뱉는 듯한 스미스 요원의 말투가 지금도 귓가에 생생하다.

매트릭스는 잘 만들어져 상업적으로도 크게 성공한 대박 영화지만, 그 안에 담긴 내용에도 여러 생각할 거리가 많다. 요즘 큰 관심을 끌고 있는 ‘메타버스’의 개념이 극단적인 수준으로 담긴 영화라고도 할 수 있다. 메타버스에 사는 사람들이 자신이 메타버스에 있다는 것 자체를 깨닫지 못하는, 장자의 나비 꿈이 떠오르는 상황이 바로 영화에 그려진 세상의 모습이다.

주인공 네오의 매트릭스 안 이름은 토마스(Thomas) 앤더슨이다. 예수의 부활을 의심하는 도마(Thomas)처럼 스스로에 대한 확신이 없던 네오는 영화 후반 스미스 요원과의 싸움 중 자신의 이름이 토마스 앤더슨이 아니라 네오라고 외친다. 네오(Neo)의 영어 철자 순서를 바꾸면 One이 된다. 자신이 세상을 구원할 구원자 ‘바로 그 (the one)’라는 것을 깨닫는 순간이다.

Neo에는 새롭다는 뜻도 담겨있다. 매트릭스에서 처음 인간을 해방한 구원자 다음에 다시 재림할 새로운 구원자라는 의미로 읽힌다. 영화에는 이처럼 기독교적 비유가 많다. 악마 루시퍼(Lucifer) 철자의 뒷부분을 딴 사이퍼는 모피우스와 네오를 배신한다. 예수를 배신한 성경의 유다에 명확히 대응한다.

기독교적 비유가 많지만, 데카르트와 플라톤의 철학, 실존주의, 그리고 심지어는 불교의 색즉시공을 떠올릴 수 있는 내용도 차고 넘친다. 네오가 찾아간 오라클은 미래를 알려주는 델피의 신전 무녀에 대응하고, 오라클의 부엌 벽에 걸린 라틴어 글귀 “너 자신을 알라”를 보면 아폴론의 신탁에 고민하는 소크라테스가 떠오른다. 현실에서 눈 뜬 네오가 눈에 통증을 느끼는 이유는 눈을 그전에는 단 한 번도 쓰지 않았기 때문이다. 플라톤 동굴의 우화 속 수인처럼 말이다.

컴퓨터 프로그램을 이용해 자주 연구를 진행하는 내게 재밌는 비유도 있었다. 프로그램에 들어있는 오류를, 벌레를 뜻하는 영어 단어 버그(bug)라고 한다. 이런 버그를 찾아내 고치는 과정인 벌레잡기가 디버깅(debugging)이다. 네오의 뱃속에 요원들이 집어넣은 살아있는 벌레는 매트릭스 안 프로그램인 네오의 버그인 셈이니, 트리니티가 네오의 뱃속 벌레를 잡아내는 것이 디버깅이다. 매트릭스에서 네오의 뱃속 벌레는 프로그램 버그다. 프로그램 버그가 영화처럼 눈에 딱 보이면 얼마나 좋을까.

인공지능이 구축한 가짜 세상 매트릭스에서 살아가던 네오에게 모피우스는 선택을 묻는다. 영화를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기억할, 유명한 “빨간 약, 파란 약”장면이다. 만약 네오가 파란 약을 택하면 매트릭스의 익숙한 삶을 계속 이어가지만, 빨간 약을 택하면 매트릭스에서 벗어나 암울하고 끔찍한 현실의 세계를 마주하게 된다.

빨간 약을 택한 네오는 암울한 ‘실재의 사막(desert of the real)’에서 눈을 뜬다. 전기 배터리처럼 전력을 기계에 공급하며 평생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담긴 고치가 끝없이 펼쳐진 끔찍한 현실을 보게 된다. 주변 사람들에게 물으면 거의 대부분은 빨간 약을 선택하겠다고 한다. 그런데, 빨간 약을 택하는 이유에 답하는 것은 쉽지 않다. 우리는 왜 쾌적한 매트릭스 안 맛있는 스테이크가 아닌 네브카드네자르(구약의 바빌론 왕 느브갓네살) 함선의 매일 똑같은 꿀꿀이죽을 택할까? 우리는 아무리 쾌락적이어도 헐벗은 경험만을 추구하지는 않기 때문이라는 것이 많은 이의 답이다.

독자도 한번 돌이켜 보라. 인터넷에서 얼마든지 더 멋진 사진을 볼 수 있어도, 우리는 미술관에서 자신의 허접한 휴대폰 카메라로 직접 사진을 찍어야 직성이 풀리는 존재다. 미술관 도록의 멋진 사진은 내가 바로 그곳에서 찍은 시원찮은 사진을 결코 대체하지 못한다. 우리는 사진에도 그림이 아니라 의미를 담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눈을 떠 바라본 실재의 사막이 아무리 황량해도, 매트릭스 안 스테이크를 거부하는 존재가 바로 우리 인간이다.

같은 강물에 발을 두 번 담글 수 없는 우리는 같은 책이나 영화도 두 번 볼 수 없다. 과거에서 현재로 이어지는 시간 진행은 비가역적이어서 지금의 내가 그때의 내가 아니기 때문이다. 이번에 다시 본 영화 매트릭스도 마찬가지였다. 예전에는 가상과 실재의 차이, 존재와 인식의 차이, 그리고 빨간 약과 파란 약의 선택에 주목했다면, 이번에는 다른 질문이 더 인상적이었다. 바로 모피우스가 묻는 ‘마음의 가시’가 가시가 되어 내 마음을 찔렀다.

젊어서 가지고 있던 가시는 무뎌져 더 이상 가슴을 찌르지 않고, 삶의 많은 것이 무덤덤한 아재가 된 지금, 다시 본 매트릭스가 내게 묻는 질문이 무척 아프다. 내 마음 속 가시는 무엇이냐고, 폐부를 찌르는 가시 없이 사는 삶이 정말 편안하냐고, 세상의 아픈 가시들을 짙은 선글라스로 모른 척하고 있는 것은 아니냐고 말이다. 매트릭스의 쾌적하고 편안한 삶과 실재의 사막을 나누는 기준은 우리 각자가 가진 마음 속 가시일지 모른다. 마음에 가시를 가진 사람만이 황막한 현실의 사막에서 눈 뜰 자격이 있다.

젊어서 그토록 자주 눈에 띄어 나를 잠 못 들게 한 그 아프지만 찬란한 가시들은 다 어디로 간 걸까? 눈길을 돌리면 아직도 우리 주변에 가시가 지천이다. 세상의 가시가 내 마음의 가시가 되지 못한 것은 바로 내 탓이다. 가시 없는 삶은 매트릭스다. 용기 안에 담겨 음식을 주입받고 몇 볼트의 전력을 생산하는 인간 배터리다. 저마다 하나씩 마음 속 가시를 품을 일이다. 빨간 약을 택해 잠 못 드는 우리 모두의 책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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