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리호’, 하청 구조에서 벗어나다 [영화와 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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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리호’, 하청 구조에서 벗어나다 [영화와 경제]
  • 김경훈 칼럼니스트
  • 승인 2021.02.14 12:1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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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승리호'의 한 장면.
영화 '승리호'의 한 장면.

맑은 날 가끔씩 하늘에 길게 한줄 비행기가 날아가거나 초저녁 어슴푸레한 밤하늘에 인공위성이 깜빡이면 의식은 영혼처럼 삶을 부감한다. 영화관은 여전히 사회적 거리두기만큼 멀리 있고, 넷플릭스는 흥미로운 영화 한편을 틀어놓고 있다.

<승리호>가 배우들의 사생활을 영화보기에 투영시키는 오지랖을 이겨내고 넷플릭스에 업로드됐을 때, 영화는 내내 우리의 낮은 기대치를 농락하며 오리엔탈리즘을 내면화한 옛 식민지국가 쁘띠 부르주아지의 허위를 가로지른다.

<승리호>와 관련된 소모적 논란 2가지가 있다.

첫째, ‘클리셰는 진부하다’에 대한 것이다.

마블의 히어로물이나 스타워즈 보기에 익숙해 있다면 <승리호>는 클리셰 투성이가 된다. 그렇다고 해서 영화의 산업적 전망을 외면하고 자폐적 껍질 안에서 줄탁동기하지 않는다면 <지구를 지켜라>의 기이함에 그대로 머물 것이다.

오래 전 재무회계 수업에서 우리 주식시장의 포트폴리오 효과는 몇 개의 종목을 보유해야 나타나는가를 주제로 리포트를 제출해야 했는데, 그 과제를 내주던 교수님은 새로운 관점이나 시도보다는 기존 문헌 파악에 집중하라고 염려한 적이 있다.

그의 말대로 이미 수많은 논문과 가설들이 참고문헌 인덱스를 가득 채웠고, ‘하늘 아래 리얼 새로운 것은 없다’라는 것을 곧 알아챘다.

관객이 영화 보는 기계처럼 과거의 영화를 복기하고 비교하는 것과 의식이 환기되는 것 사이에는 생물학적 바디가 가로놓여 있다. 신체는 한계이자 가능성이기도 하다. 우리는 의식이 아닌 몸을 통해서 행동하고 이 행동이 실재계에서 어떤 파동을 일으킬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승리호>에서 로봇인 업동은 여성의 몸을 선택한다. 사회 일반에서 주로 남성만이 성과 직함으로 불리는 것은 주체의 지위에 기입되는 것을 의미하는데 반해, 업동이 승리호 안에서 큰 타자(A)로 삼을 만한 사람은 장 선장과 태호뿐이었다.

이름만 빼놓고 보면 여자로 보이지 않는 아이는 대상적 타자(a)로 태호를 호명하는 것처럼 언뜻 보이지만, 꽃님이는 승리호 안의 선원 모두를 각각 호명하고 스스로 만백성, 혹은 이상적 자아의 자리에 위치하며 환상 가로지르기를 시도한다.

업동이 우주선 밖에서 릴케의 시를 읽고 있던 모습은 마를린 먼로가 조이스의 <율리시즈>를 펼쳐들고 있던 사진과 같다. 즉, AI시대의 타자는 AI임을 의미한다.

<승리호>의 클리셰는 대부분 액면이 아닌 비비꼬아 놓은 것들이다. 이것은 답습이 아닌 뒤집기에 가깝다.

둘째, ‘신파는 특수하다’에 대한 것이다.

몇 해 전 <인터스텔라>를 보는 내내 신파적이라고 느꼈다. 수십 년 간 보아 온 한국 드라마의 전형에 길들여진 나로서는 <인터스텔라>의 부성애를 신파가 아닌 다른 것으로 보기 어려웠다.

프랑스에서 승리호가 넷플릭스 개봉 즉시 1위를 차지한 것은 전혀 의외가 아니다. 그들은 할리우드 신파와는 다른 강렬함을 <승리호>에서 감지한 것이다. 신파는 보편적 인류애이고 문화적 특성에 따라 달리 표현될 뿐이다.

가부장제의 양면에서 방사되는 부성애는 가부장제를 거꾸러뜨리기도 하고 강건하게 유지시키기도 한다. 이 양가성이 누군가를 불안하게 만들었다면 그는 여전히 타자에 머물러 있는 것이다. 주체는 양가성을 혼란스러워하지 않고 틈입하기 때문이다.

이제 영화산업은 전방위적인 지평 속으로 달려갈 것이다. <지구를 지켜라>에서 <승리호>로 타임 워프했고 그것은 곧 자본의 유입과 고용의 증진을 뜻한다. 하청 업체가 아닌 탈식민지시대의 주체에게 클리셰와 신파는 도전을 위한 좌표에 불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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