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범준의 세상물정] ‘흰금파검’과 ‘틀림과 다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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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범준의 세상물정] ‘흰금파검’과 ‘틀림과 다름’
  • 김범준 편집위원(성균관대 교수)
  • 승인 2020.01.10 14: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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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1. /출처=위키피디아
그림1. /출처=위키피디아

같은 이미지를 다르게 보는 착시는 잘 알려진 현상이다.

검은색 바탕에 흰색으로 칠해진 꽃병이 가운데 보이다가, 다시 바라보면 검은 색으로 칠해진 두 사람의 옆얼굴이 서로 마주 보는 모습으로 보이는 착시 그림(그림1)이 있다.

또, 왼쪽을 보는 오리의 옆모습으로도, 오른쪽을 바라보는 토끼의 옆모습으로도 보이는 그림(그림2)도 유명하다.

이 그림들을 유심히 바라보라. 큰 노력을 기울이지 않아도 우리 모두는 꽃병을 인식하다 어느 순간 자유롭게 얼굴을 인식할 수 있고, 오리와 토끼, 두 모습을 서로 넘나들며 인식할 수 있다.

그림을 앞에 놓고 무엇을 인식할지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다. 둘 모두를 볼 수 있지만, 둘을 함께 보지는 못한다.

그림2. /출처=위키피디아
그림2. /출처=위키피디아

이 글을 읽는 독자도 한번 해보시라. 오리를 볼지, 토끼를 볼지, 우리 마음대로 골라 원하는 것을 볼 수 있지만, 오리와 토끼를 동시에 함께 볼 수는 없다. 사람의 의식은 부분적인 정보를 통합해 전체를 하나로 인식한 것이기 때문이다.

통합한 정보로 이끌어낸 의식적인 판단은 서로 모순된 두 상태를 동시에 갖지 못한다. 우리는 부분을 모아 전체를 보고, 전체는 하나의 통합된 상태만을 가진다.

서로 싸울 일도 없다. 오리로 본 사람은 토끼로 보인다는 사람을 쉽게 이해할 수 있고, 토끼로 본 사람도 오리를 본 사람을 이상한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누구나 약간의 노력을 기울이면, 오리와 토끼, 둘 모두를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오리-토끼 착시 그림에서 각자는 매번 다른 것을 보지만, 결국 “우리 모두는 두 가지 다른 것을 본다”는 같은 결론에 도달한다. 다투거나 논쟁할 이유가 없다.

다른 착시도 있다. 모두 똑같은 것을 보지만, 우리 모두가 잘못 보는 착시다.

그림3. /출처=위키피디아
그림3. /출처=위키피디아

체크무늬가 보이는 곳에 표시된 A와 B는 우리 모두의 눈에 당연히 다른 밝기로 보인다(그림3). A가 B보다 어두운 색이라는 것에 모두가 동의한다. 정말 그럴까?

다른 모든 부분을 가리고 A와 B를 보면 둘은 정확히 같은 색이다. 믿기지 않는 분은 필자가 같은 그림에서 A 부분을 떼어내어 옮겨 붙인 그림(그림4)을 보라. B옆에 놓인 A는 이제 B와 똑같은 색으로 보인다.

A와 B는 정확히 같은 밝기인데도 우리가 둘을 다른 밝기로 보는 이유가 있다. 우리 모두는 빛이 오른쪽 위에서 비추고 있어서 A는 원기둥 그림자의 밖에 있지만 B는 그림자 안에 있다고 생각한다.

그림4. /출처=위키피디아
그림4. /출처=위키피디아

B의 화면에서의 색은 A와 같은 밝기이지만, 우리의 뇌는 그림자 안 B가 그림자 밖 A와 같은 밝기라면 당연히 원래의 색은 B가 더 밝다고 판단한다. 이 착시는 우리가 현실에서 대상을 인식할 때 아주 중요하다.

물체의 주변 상황이 바뀌어도 우리는 보고 있는 물체를 같은 사물로 인식한다. 햇빛에서 파란색으로 보인 물체는 집 안에서도 파란색으로 본다. 상황이 달라져도 여전히 변함없이 유지되는 속성을 우리 뇌가 파악한다는 얘기다.

이처럼, 우리가 무언가를 본다는 것은 수동적인 것이 아니다. 우리 뇌가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능동적인 과정이다. 우리 눈에 B라는 작은 사각형에서 반사한 빛이 들어와 망막에 맺힐 때, 우리 뇌는 B가 놓인 전체의 맥락을 파악해 B를 본다. 우리는 알아야 볼 수 있다.

원기둥 그림자 속 사각형 밝기에 관한 착시에 대해서도 우리는 서로 다툴 일이 없다. 우리 모두가 똑같이 잘못 보기 때문이다. 그리고, 설명을 듣고 나면, 왜 우리가 잘못 보는 지에 대해서는 공통의 이해에 도달할 수 있다. 모두가 틀렸지만, 왜 틀렸는지, 그 이유에는 모두가 동의한다는 뜻이다.

/사진=온라인 커뮤니티
/사진=온라인 커뮤니티

다른 착시도 있다. 각자 다른 것을 보지만, 내가 보는 것을 다른 이가 보지 못한다는 것을 이해할 수 없는 착시다.

몇 년 전 큰 관심을 끈 “흰금파검” 드레스가 바로 이 착시다. 누군가 SNS에 올린 옷 사진 한 장이 문제였다. 이 옷을 화면으로 본 사람들은 크게 두 그룹으로 나뉘었다. 흰금파와 파검파로 말이다.

흰색 바탕에 금색 가로 줄무늬를 보는 사람들이 흰금파, 파란색 바탕에 검정색 줄무늬를 보는 이들이 파검파다. 필자는 흰금파다. 이글을 읽는 독자 중에는 아니 어떻게 이 옷이 파검이 아니라 흰금으로 보이는지, 도저히 필자를 이해 못하겠다는 분이 많을 것이다. 독자도 주변 분들에게 물어보시라. 흰금과 파검으로 나뉘고, 서로는 상대를 이해하지 못한다.

흰금파검 드레스는 앞에서 소개한 착시와 무척 다르다. 꽃병과 얼굴, 오리와 토끼는, 원하면 다르게 보는 것이 가능한 착시다. 잠깐 꽃병으로 보이더라도 잠시 뒤에는 얼굴로 보여서, 옆 친구가 꽃병으로 보인다고 하나, 얼굴로 보인다고 하나, 그 친구를 우리는 이해할 수 있다.

흰금파검 드레스는 그림자 속 사각형 밝기 착시와도 다르다. 사각형 밝기 착시에서 우리는 하나같이 모두 잘못 보지만, 정확히 똑같이 잘못 본다. 흰금파검 드레스는 흰금파와 파검파로 사람들이 두 그룹으로 나뉘고, 한번 흰금파는 계속 흰금파다. 명백하게 흰금으로 보이는 필자에게 파검이라고 얘기하는 사람들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고, 파검파는 필자의 흰금을 이해 못한다. 서로를 설득할 수 없다.

요즘 우리 사회에서 자주 벌어지는 갈등을 보면서 필자는 흰금파검 드레스를 떠올렸다. 흰금파검 드레스를 보면서, 나는 맞고 너는 틀리다가 아니라, 너와 내가 다를 수 있음을 떠올린다. 결국 흰금파검 드레스를 생산한 회사가 나서서 정답을 알려줬다. 이 드레스는 파검이다.

그래도 어쨌든 내게는 여전히 흰금이다. 아니, 어떻게 저 드레스가 파검으로 보일 수 있는지 여전히 이해하지 못한다. 다르다고 틀린 것은 아니다. 네가 틀릴 수 있다면 나도 틀릴 수 있다고 의심해보자는 것이 필자가 흰금파검 논쟁에서 얻은 교훈이다.

서로를 이해할 수 없을 때, 우리가 할 일은 다름을 틀림으로 생각하고 있지는 않은지, 스스로를 돌아보는 성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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