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것은 ‘추상의 빈 그릇’, 유영국의 山 山 山… [강태운의 빛과 그림자]
하늘이 붉다. 주홍의 산이 양쪽에서 청보라의 산과 어깨를 맞댄다. 그 아래로 검푸른 건 바다일까. 보통이라면 비웠을 하늘까지 짙게 칠해졌다. 산수화에 익숙한 눈에는 낯선 충만이다.
"아버지는 굉장히 현실적인 사람이었어요." 차녀 유자야가 기억하는 유영국은 화가라는 말이 풍기는 낭만과 거리가 멀었다. 왜 평생 산을 그렸느냐에 대한 그의 답부터 그렇다. 피카소 같은 천재라면 무엇을 그려도 제 것으로 만들겠지만 자신은 그런 천재가 아니어서, 그릴 것이 많은 산을 원천이 되는 소재로 ‘잡았다’는 것이다. 산을 그리고도 제목은 대개 '작품(Work)'이었다. 그에게 산은 숭배의 대상이라기보다 도구에 가까웠다. 사실화를 못 그리겠다는 딸에게 남긴 말에도 같은 태도가 배어 있다. "산에 올라가는 길은 여러 가지다. 네가 할 수 있는 방법으로 그려라."
도쿄에서 전위 미술의 한복판에 있던 유영국은 태평양 전쟁이 절정이던 1943년 귀국했다. 고향 울진으로 돌아가자마자 붓을 놓고 부친이 운영하던 고깃배를 탔다. 화가로서의 자신을 비우고, 어선을 부리고 양조장을 돌리며 가족의 생계를 채웠다. 사람의 내면은 일정한 그릇이다. 바깥의 것을 채워 넣으면 제 것은 비워지기 마련이다. 유영국은 이 시간을 ‘잃어버린 10년’이라고 불렀다. “그림을 그려야 하는데.”라면서 울기도 했다.
1964년, 마흔여덟의 유영국은 첫 개인전을 열면서 앞으로 동인 활동도 외부 활동도 하지 않겠다고 선언한다. 한국 추상의 판을 짠 모임들을 손수 조직해 온 사람의 선언이라 더 이례적이었다. 할 만큼 했다는 판단이 섰다. 한묵과 문신이 파리로, 김환기가 뉴욕으로 떠났다. 저마다 새로운 길을 도모하던 그때, 유영국은 이대로 밖으로 나가봐야 변방의 화가밖에 안 된다고 생각했다. 화실로 침잠하면서 급변하는 시대의 속도에 휩쓸리지 않고 오직 자신만의 내밀한 예술 언어에 집중했다. 많이 만나고 많이 알면 마음이 복잡해진다. 유영국은 심플하게 살았다.
유영국이 산을 그리기 시작한 뒤에도 화면은 평온해지지 않았다. 산이라지만 일관된 모습은 없었고, 빨강과 노랑과 파랑의 삼원색 위에 그만의 보라와 초록이 변주되었다. 그 강렬한 원색은 감정의 폭발이라기보다 질서를 붙드는 힘에 가까웠다. 전쟁과 생계와 욕망으로 복잡한 세계를 산이라는 형식으로 붙들려는 악력이다. 잡을 것은 산밖에 없었는지도 모른다.
그는 색과 형체를 단순화했다. 절묘한 색채의 조화를 추구하되, 표면의 재질감을 최대한 살리는 방식으로 탐구를 이어갔다. "사물을 단순화해서 아주 다 없어진 다음에 새로 나타나는 것을 생각한다. 목수가 대패질을 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같은 산을 그리고 또 그리는 동안 — 항상 같은 것 같지만 항상 다른 산을 — 실제 울진의 산은 조금씩 물러나고, 산은 그의 내면을 정돈하는 질서가 되어 갔다. 사람들이 말하는 '심상의 산'이란 처음부터 마음속에 있던 풍경이 아니라, 평생의 반복 끝에 내면이 얻어 낸 질서였다.
만년의 화면은 눈에 띄게 순해진다. 팽팽하던 산들이 물러나 보는 사람을 풍경 안으로 걸어 들어오게 한다. 세상에 관대해졌을까. 8번의 큰 수술을 치르고 37번의 입퇴원을 반복하는 병고에도 그는 결코 붓을 내려놓지 않았다. 조수도 없이 모든 작업을 직접 자신의 손으로 제작했다. 유영국은 할 만큼 했을 것이다. 움켜쥐던 손에서 힘이 빠진 자리에 서정이 스민다. 2002년, 그의 묘비에는 한 줄만 새겨졌다. “산은 내 앞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있다.”
비우라고 부추기는 시대다. 버리는 법을 가르치는 책이 서가를 채우고, 덜 소유할수록 더 자유롭다고 말한다. 사람은 정말 자신을 온전히 비울 수 있을까. 유영국은 현실적이었다. 그는 비움을 목표로 삼지 않았다. 산으로 화면을 채웠다. 산을 거듭 그리는 동안 산은 풍경이 아니라 내면을 질서 있게 만드는 형식이 되었다. 그 질서가 깊어질수록 복잡한 욕망은 설 자리를 잃었고, 화면은 점점 단순하고 평온해졌다. 산은 추상의 빈 그릇이었다. 그러고 보면 그는 평생 빈 것으로 자신을 채워 온 셈이다. 비울 수 없다면, 산으로 채울 수밖에.
※ 서울시립미술관은 한국 추상 미술의 선구자 유영국(1916-2002) 탄생 110주년을 기념하여 역대 최대 규모의 회고전 《유영국: 산은 내 안에 있다》를 오는 10월 25일까지 개최한다. 미공개작을 포함한 회화, 부조, 사진, 드로잉 작품 및 아카이브 170여 점을 통해 그의 예술을 총체적으로 조망한다. 본 글은 전시 영상, 전시 보도 자료를 참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