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 지방선거와 서울시민의 욕망, ‘군체’ 수준으로 퇴행하다 [김경훈의 시네노믹스]

2026-06-04     김경훈 칼럼니스트
영화 ‘군체’의 한 장면. /사진=쇼박스

숨죽이고 있던 인터넷 댓글 공간이 술렁이고 있다. 계엄 사태를 제압했던 시민 세력이 지지하는 정부가 1년여의 임기를 보내고 중간평가의 성격을 띠는 지방선거가 치러졌기 때문이다.

도지사나 광역단체 시장 등 지방자치단체장을 선출하는 선거는 지자체 공무원들의 직업 안정성을 흐려놓지만, 그만큼 지역 토착 비리는 양지에서 쏟아지는 햇빛에 노출되고 조명될 가능성도 커졌기 때문에, 특정 정파에만 일방적인 지지를 보내는 일부 지역 말고는 그야말로 계몽을 넘어 ‘격몽’의 환기와 자각이 요동치는 장치라고 할 수 있다.

그 가운데 서울시장 자리를 놓고 벌어진 여야의 대결은 서울 시민들의 욕망이 가감 없이 드러나고 반영됐다. 1997년 외환위기 이후 보수정당은 그들의 장기라고 할 수 있는 구조조정의 멍에를 떠안을 책임감 혹은 자신감을 거의 상실한 것으로 보인다. 그 대신 부동산 경기를 부양하는 정책만이 그들의 지지자들에게 호소할 수 있는 유일한 퍼포먼스가 되어버렸다.

군사정권 내내 그리고 문민정부에까지 멈추지 않고 이어지던 산업구조의 현대화 계획과 혁신 드라이브는 갑자기 감당할 수 없는 짐이 되어버린 듯하다. 그 결과 외환위기 이후 집권했던 보수정권의 경제 성적표는 대부분 보잘것없었는데, 어떻게 주택 가격이 회복될 수 있었겠는가? 당연히 GDP와 주택 가격은 언제나 제자리걸음이었다.

오히려 진보정권은 계획이 있든 없든 경제개혁에 도전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고 그 결과 산업 전반의 구조조정으로 이어졌다. IMF 구제금융 이후 강요된 김대중정부의 개혁은 비로소 우리나라 대기업에 다국적기업의 타이틀을 안겨주었고, 노무현·문재인정부의 개혁은 노동운동에 대한 완화된 억압만큼 대기업들에 대한 간섭도 약해져 결과적으로 작은 정부의 모습을 띠게 되었고, 기업은 효율성이라는 과제에 좀 더 집중할 수 있었다.

그 결과 GDP 성장에 따라 주택 가격도 상승했는데, 그들은 과도한 자신감으로 혹은 지지자들에게 인정받기 위해서 주택 가격 억제 정책을 끊임없이 발표했지만, 집값은 폭등했다. 시장은 정책 효과에 대한 예측과 정책 수단의 시차를 미스 매치의 신호로 받아들였고, 정책 입안자들은 충분히 불안해 보였다.

이와 같이 보수정권은 규제를 완화하여 집값을 떠받치려 했지만, 경제 실정으로 집값은 하락했고, 진보정권은 규제 강화로 집값을 잡으려 했지만, 성장과 유동성은 온갖 규제책을 무력하게 만들었다. 부동산시장을 둘러싼 보수정권과 진보정권의 자기모순은 규제가 아니라 경기 자체에 문제의 해법이 있음을 알게 해준다.

새롭게 출범한 민주 정부도 자본시장의 효율성과 신뢰성을 확보해 미래 기대 수익이나 자산 가격에 비해 저평가된 주식의 표면 가격을 높이는 아베식 개혁을 시작했고, 아베가 10년 가까이 추진해 거뒀던 실적을 불과 6개월 만에 달성(물론 AI 산업의 광기와 함께)함으로써, 자산시장 포트폴리오 구성에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온 듯 보였다.

그렇게 새로운 회계연도의 분기별 GDP는 예상치보다 높게 성장했고 주식가격 또한 폭등했는데 어떻게 집값만 제자리에 머물 수 있겠는가? 불안하면, 자신감 없어 보이는 주택 가격 억제 정책의 남발 대신, 2022년 이후 건설 산업의 오래된 과제인 PF 구조조정을 단행하라고 권하고 싶다. 그러면 수도권 부동산 가격의 핵심인 토지 가격의 하락을 경험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이미 1996년 외환위기나 2008년 금융위기를 통해서 겪어본 것이다.

또한 자본시장에서 축적된 자본으로 중국과의 경쟁에서 쇠퇴하고 있는 철강·석유화학 등 산업의 경쟁력 제고를 위한 구조조정을 단행해야 한다. 이 역시 오바마 시대 이래의 오래된 과제였는데, 자본시장의 급속한 팽창은 산업 구조조정을 위한 밑천으로 쓰여 지지 않는다면 그야말로 불로소득에 머물고 만다.

노동과 여가의 대체 관계를, 혹은 노동과 자본의 긴장 관계를 발전적으로 유지하고 싶다면, 자본시장을 일본처럼 좀비기업의 양분으로 만들고 싶지 않다면, 구조조정이라는 지옥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 연상호 감독의 <군체>는 이런 면에서 많은 함의를 지닌다.

생물학자 에드워드 윌슨은 <인간 존재의 의미>에서 ‘지구상에서 개체수가 증가하는 종의 특성은 군집 생활을 하고 여러 세대가 합심해서 새끼들을 돌보거나 번식 확률을 높이기 위해 번식 기회를 양보한다’라고 기술하고 있다.

인간 사회의 공동체 역시 이러했는데, 최근 서유럽이나 동북아시아의 이른바 선진국 그룹에서 나타나는 인구증가율의 감소는 나르시시즘이 극단적으로 나타난 일종의 자기 부패 혹은 거세를 의미하며 나아가 집단 자살을 가리키는 것이기도 하다.

다른 말로, 에고가 의사소통 행위를 통해 주체를 형성하지 못하고 오타쿠 같은 상상적인 자기 동일시에 머무르기 때문에 생식의 단절을 자처한다. 즉, 기존의 상징체계에 편입하지도 않고 미래 세대에게 양보하지도 않겠다는 선언(예; 국가를 위해서 총을 들고 헌신하지 않겠다, 부모 세대처럼 자식을 위해 희생하지 않겠다 등등)이 사회적으로 용인되고 있다는 것이기도 하다.

<군체>에서 좀비들이 완전한 의사소통이라는 허울 아래 우두머리의 일방적이고 획일적인 지시에 따라 움직이는 건, 현실 사회에서 조직폭력배, 주가조작단, 인터넷 도박단, 일베 유튜버 등과 같은 형태로 실제 부딪히게 되지만, 그 생명력은 여왕벌과 일벌 혹은 여왕개미와 일개미와의 관계보다도 못하다.

그 욕망의 대상이 너무도 비루하고 이기적이기 때문이다. 자본주의 생태계 발전의 원동력인 이기심이 결국 이타심을 토대로 하는 ‘진사회성’(eusociality)을 서서히 파괴할 가능성이 높다. 따라서 선진 자본주의 국가에서 예외 없이 나타나는 경제활동인구의 감소는 이기심을 다스리는 법도(예; 청교도적 근면성, 성리학적 질서 등등)의 작동 없이는 피하기 어려운 숙명 같은 것이다.

최근 어떠한 이유에서인지 보수와 진보 모두 산업의 재편이나 구조조정은 거론하지 않고 주식가격의 기술적 제고나 부동산 가격의 거품에만 의존하려는 하루살이 식 정책에 매달리고 있다. 마치 앤트밀(Antmil)에 빠진 개미 떼에 가깝다. 방향을 찾기를 바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