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목지’에서 완전히 벗어나기 [김경훈의 시네노믹스]

2026-05-06     김경훈 칼럼니스트
영화 ‘살목지’의 한 장면. /사진=쇼박스

저수지는 농경사회에 있어 도서관과 같다. 농사짓는 법과 관련된 지혜와 경험은 상당 부분 저수지의 축조와 운영에 집중되기 마련이다. 또한 산업사회가 고도화하면서부터는 자연이 이미 극복이 아닌 공조의 대상으로 바뀌게 되었기 때문에, 저수지는 점점 더 우리의 관심과 시야에서 사라지고 있었다.

하지만 여전히 저수지는 농경사회와 산업사회의 경계성 문제를 그대로 내포하고 있다. 그 언캐니 밸리의 어색함과 불편함은 기후 위기에 따른 이상 고온과 가뭄으로 말라붙어 거북이 등 껍데기 같은 바닥을 드러냈을 때 흉흉한 소문으로 떠오른다.

문화강국인 우리의 도서관 편제와 분포는 저수지의 조성과 분포에도 그대로 투영된다. 빈틈없이, 농사를 짓는 들판 넘어 산골짜기 곳곳에 도사리고 있는 것이다.

20세기가 저물고 유럽의 지성들이 뼈아프게 회의(懷疑)하던 문제는 민주주의와 자본주의가 냉전을 끝내고 극성했음에도, 여전히 전체주의나 권위주의적인 포스에 투항하는 자유의 몰각이 피할 수 없다는 것이다. 마치 살목지에 갇혀 영원히 벗어나지 못하는 끝없는 회귀, 순환적 운명에 걸려든 것처럼 말이다.

사실 주권(主權)이든 주권(株券)이든 힘의 분산과 힘의 견제는 유한책임과 무한책임 사이의 변증법적 모순관계 속에서 작동하는 것이다. 자유라는 바다 위에 오래 떠있다 보면 물속에 그대로 잠기고 싶은 유혹에 빠져들 때가 있다. 유한책임의 편리와 권태가 도리어 민주주의를 값싸게 만드는 것이다.

더하여 소비사회의 ‘하이퍼 리얼리즘’(Hyper Realism)에 노출되면 대부분 참여자가 아닌 관찰자의 위치에 머무르는 것에 익숙하게 된다. 더 이상 역사의 주체가 아닌 더불어 객체도 아닌 다른 말로 하면, ‘굿이나 보고 떡이나 먹자’ 식의 방관자 자리에 스스로 기입하는 것이다.

마치 욕망에 지친 자에게 포기라는 달콤한 선물을 주듯이 말이다. 하지만 자유의지가 ‘영원한 회귀’라는 공허에 갇힌 때에도 누군가는 끝없이 반복되는 고(苦)와 집(集)에서 벗어나려고 하기보다는, 그 자체를 ‘향유’(쥬이상스, jouissance)함으로써 오히려 주체의 자리를 되찾기도 한다.

영화 <살목지>에 나오는 인물들은 작업 현장의 공동체를 구성하는 일원으로서 평범한 일상을 영위하는 비교적 소박한 욕망에 매달려 있을 뿐이었다. 오히려 이들을 살목지의 깊은 심연으로 내모는 지역 공동체(cf. 아파트 가격에 담합을 강요하는 입주민들, 마을에 도래하는 위험을 외면하는 관광지의 주민들, 이웃 마을의 가뭄 해결에 공조하지 않는 소지역주의에 사로잡힌 주민들 등)의 과민 반응이야말로 도착(倒錯)과 소외를 만들 뿐이다.

저수지를 둘러싼 이러한 소외는 그 역사가 깊다. 농경사회에서 저수지는 유전보다도 자동차공장보다도 반도체공장보다도 치명적이다. 집성촌의 엄격한 가부장적 규율이 관철됐고 비극적 소외를 만들어냈다.

영화 ‘살목지’의 한 장면. /사진=쇼박스

<살목지>에서 가장 두려운 장면은 꿈과 현실의 장벽이 사라지는 순간, 살목지 밖과 안의 구별이 사라지는 순간 다가온다. 빛과 이미지, 그리고 언어가 상징하는 현실이 끊기고 구멍은 점점 더 커져 현실을 삼킨다.

실제로 최근 다시는 불가능한 시도라고 여겼던 계엄령이 선포되고 군정이 획책됐지만, 마치 21세기의 마지막 ‘운빨’처럼 시민들의 희생 없이 계엄을 막아냈던 적이 있다. 유럽과 동아시아, 미국 모두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출현한 장기 집권, 파시즘적인 언론과 이성의 도구화, 사법부의 형해화 등이 민주주의와 자본주의의 운명을 다시 시험하고 있는 것이다.

계엄령이 느닷없이 겨울밤의 고즈넉함을 깨뜨리며 실제 벌어졌듯이 세계에 출몰하고 있는 갖가지 징후들은 서유럽의 대의 민주제와 동아시아의 관료제가 꽃피우는 자본주의의 범람이 사그라들고 있음을 보여준다.

또한 21세기의 히틀러나 히로히토라면 반드시 AI와 결탁하여 인류를 완벽하게 억압할 기회를 얻었다고 판단할 것이고 흔히 보듯이 미신이나 무속이 부채질하는 독재자의 옹졸한 광기는 초자연적 현상(cf. 양자 중첩이나 양자 얽힘이 완곡하게 설명할 수 있는 것 포함) 앞에서만 방향을 튼다.

결국 끝없이 순환하는 역사의 루프(loop)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소비사회의 무한 탐닉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덧없는 공허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고(苦)와 집(集)이라는 환상을 건너가기 위해서는 관찰자가 아닌 영매(靈媒)의 시선을 회복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황새공원 주차장에 차를 세워두고 살목지 저수지를 찾아가는 길은 품위 있는 시골길이다. 마을을 수호하는 나무 곁을 지나가면 운 좋게도 관광객들을 반갑게 맞아주는 할머니를 만나 뵐 수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