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멸의 시학, ‘삭는 미술’에 대하여 [강태운의 빛과 그림자]

2026-04-20     강태운 미술칼럼니스트

전시는 여러 작품을 특정 공간에 벌여 놓고 보이게 하는 형식이다. 개별 작품은 세계를 향해 던지는 작가의 문제의식을 추상화한 것이다. 현실을 떠나 전시장이라는 공간에 스스로를 가둔 채 현실을 비판한다는 것은, 일면 모순처럼 보인다. 작은 컵으로 바다를 뜨는 것과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컵으로 떠 올린 물을 우리는 여전히 바닷물이라 부르지만, 그것은 이미 바다가 아니다. 다시 바다에 닿기까지는 또 다른 과정이 필요하다.

이러한 간극을 좁히려는 시도 또한 존재한다.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지하 1층에는 ‘전시마당’이라 불리는 너른 공간이 있다. 미술관 내부에 있으면서도 천장이 없어 바깥과 이어진다. 2024년 한국 최초의 여성 조경가인 정영선의 개인전을 계기로, 이곳은 한반도의 자생식물과 야생화가 어우러진 정원으로 탈바꿈했다. 안과 밖, 작품과 자연을 잇는 이 공간에서 작품은 유리 수조 안에 박제된 대상이 아니라, 생성과 소멸의 시간을 보내는 하나의 존재로 살아간다.

단순히 재현으로는 바다에 닿기 어렵다는 인식에서, 그 흐름 속으로 들어가 다시 시작하는 방식이다. 이는 단지 바라보는 방식을 바꾸는 데 그치지 않는다. 세계를 대상화하는 대신, 그것과 관계 맺는 방식을 바꾸는 일이다. 세계와의 관계가 달라지면, 작품이 존재하는 방식 또한 달라진다.

전시마당 전시 전경.

전시마당을 무대 삼아 풀을 뭉쳐 만든 고사리의 <초사람>과 흙을 다져 만든 김주리의 <물 산>이 마주한다. 인간과 그 터전이 자연의 소산과 만나는 통로의 역할을 한다는 점에서 두 작품은 정원과 마당의 성격을 함께 지닌다. 계절을 나며 작품은 서서히 형태를 잃어가고, 작품이 허물어진 자리에는 새싹이 움튼다. 자연의 시간을 자기 몸에 새기면서 작품은 소멸에서 생성으로 이어진다.

고사리는 생태적 감수성과 돌봄의 태도로 흙에서 나고 흙으로 돌아가는 생명의 흐름을 담아낸다. 보이지 않을 만큼 작을지라도 분명 존재하는 무엇과 그 존재들이 살아가는 시간을 따듯한 시선으로 바라보며, 인간과 자연 사이의 관계 회복을 꿈꾼다.

고사리, '초사람', 2026

작가는 2021년부터 서울 여러 공간에서 제초된 풀로 사람을 만들어 왔다. 이번 전시에서는 미술관 곳곳의 정원에서 제초한 풀로 <초사람>을 만들어 선보인다. 잡초는 왜인지 길가나 밭, 개간된 땅과 같이 사람과 자연이 만나는 곳에서 발견된다. 숲속의 질긴 식물들 사이에서 버티기 어려운 탓도 있겠지만, 무엇이 풀이고 무엇이 잡초인지 구분하는 사람의 시선 때문일지도 모른다. 이름 없이 자란 잡초가 작가의 손길로 얽히고 뭉쳐 ‘초사람’으로 태어난다. 초사람은 우리를, 눈사람을 만드는 어린아이의 마음으로 놀이하듯 자연과 마주하게 한다.

김주리는 흙, 물, 불 같은 자연의 요소들이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만들어 내는 생성과 소멸의 과정을 조각으로 다룬다. 작가에게 물질은 단순한 재료가 아닌, 순환하는 생명의 은유이자 시간의 감각을 드러내는 매개체이고 스스로 작동하는 행위자다. <물 산>은 작품이 전시장이라는 통제된 환경을 벗어나 자연의 시간 속에 놓일 때 발생하는 변화를 탐구한다.

건축물을 연상시키는 조각의 형태는 인간이 자연에 맞서 만들어 낸 구조, 말하자면 문명의 형식을 닮아 있다. 단단히 다져 세운 기둥과 능선은 햇빛과 바람, 비를 맞으며 서서히 깎여 나가고, 조각에는 시간의 흐름이 새겨진다. 그러나 ‘물질[物]’과 흐르는 ‘물[水]’, 그리고 ‘산[山]’과 ‘나다[産]’라는 뜻을 동시에 가리키는 제목은, 작품이 해체의 과정이 아닌 물질의 생동을 다루고 있음을 상기시킨다. 허물어진 조각은 새싹에 몸을 내주며, 새로운 생명이 자라나는 터전이 된다. 변화하는 풍경과 하나 되어 조각은 소멸로부터 생성으로의 이행을 체현한다.

<초사람>과 <물 산>은 국립현대미술관 서울에서 오는 5월 3일(일)까지 열리는 《소멸의 시학: 삭는 미술에 대하여》 전시의 일부다. 이번 전시는 ‘소멸’, 즉 자신의 분해를 공공연히 드러내는 국내외 작가 15인(팀)의 회화, 조각, 설치 등 50여점 작품을 ‘삭는 미술’이라는 이름으로 묶어 선보인다.

'삭다'라는 우리말에는 '썩은 것처럼 되다', '생기를 잃다'와 더불어 '소화되다', '발효되어 맛이 들다'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 이 단어는 오늘날 작품의 변화를 해석하는 데 유효한 통로를 제공한다. 썩는다는 표현에 담긴 부정적 함의를 넘어 에너지의 하강과 상승을 모두 포괄하고, 발효와 같이 인간이 아닌 존재와 협력하여 이루는 질적 고양을 떠올리게 한다는 점에서다.

훌륭한 작품이란 곧 변하지 않을, 혹은 영원히 변해서는 안 될 작품이라는 통념이 과연 동시대에도 유효한가? '작품'이 허물어진 곳에 풀이 자라고 바람이 불고 보이지 않는 생명이 움직이기 시작한다. <삭는 미술>, 그 소멸과 생성의 장으로 여러분을 초대한다.

아사드 라자(Asad Raza), '흡수', 2026

아사드 라자(Asad Raza)의 <흡수>(2026)는 서울에서 나온 폐기물을 뒤섞어 작가가 네오소일(Neosoil, 서울대학교 토양생지화학 연구실의 실험과 자문, 공개 모집된 시민 경작자들의 정성 어린 손길로 제작된 흙)이라고 부르는 비옥한 토양을 만들고 원하는 이들에게 분배하는 작품이다. 공동체의 경험이 새겨진 아카이브이자 토대인 흙을 재생시키고 나누며, 작품은 삭는 미술에 내재하는 공동성의 계기를 보여준다.

유코 모리, '분해', 2025

유코 모리의 <분해>는 과일이 시간이 지나며 익어가는 과정에서 출발한다. 작가는 과일에 전극을 꽂고, 과일 내부에서 끊임없이 변하는 수분을 측정한다. 이어서, 감지된 수분은 소리와 빛, 움직임을 생성하는 원천 역할을 한다. 과일이 부패하면서 내부에서 생기는 변화는 음정의 높이, 빛의 세기 또는 깜박임, 나비의 날갯짓을 변화시킨다. 시간에 따른 과일의 변화가 다감각적으로 증폭되며, 물질에 깃든 에너지는 새롭게 환기된다. 유코 모리는 소리, 중력, 바람, 습도, 빛과 같이 눈에 보이지 않는 힘이 물질과 만나 일으키는 우연한 ‘사건’에 주목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