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에서 민주주의를 배울 수는 없을까 [김범준의 세상물정]

박지형 교수의 ‘스피노자의 거미’

2026-04-08     김범준 편집위원(성균관대 교수)
/사진=클립아트코리아

오늘 소개할 책은 이화여대 환경공학과 박지형 교수의 <스피노자의 거미>다. 역사학, 정치철학, 생태학, 경제학, 수리 생물학 등 다양한 학문 분야를 거미줄처럼 촘촘히 연결해 커다란 구조물로 쌓아 올린 역작이다. 추천사에서 최재천 교수는 이 책을 처음 접한 자신의 마음을 “월리스의 편지를 받아 든 다윈의 심정”에 비유했다. 아직 세상에 공개하기 전인데 자신의 진화론과 거의 같은 내용을 담고 있는 월리스의 편지를 받고 깜짝 놀란 다윈의 심정이 딱 추천자의 마음이라는 얘기다. 나도 이 책을 처음 읽고 마찬가지로 강한 인상을 받았다. 이 책은 “능력이 부족해 나는 쓸 수 없지만 내가 쓰고 싶은 책”이다.

자신의 좁은 전공 분야에 대해서만 깊은 지식을 가진 이들을 저자는 ‘바보 천재’라고 부른다. 사회학자 노명우 교수의 ‘전문가 바보’도 비슷한 얘기다. 학계, 특히 이공계에는 전문가 바보에 가까운 이들이 정말 많다. 학문의 지형이 여러 세부 분과로 나뉘어 자신의 전문 분야가 아니면 실제로도 잘 모르기 때문이라는 것이 첫 번째 이유지만, 또 다른 중요한 이유가 있다. 학계에는 자신의 분야가 아닌 다른 분야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는 것 자체를 두려워하는 문화가 있어서, 아예 타 분야에 관심을 가질 엄두도 내지 못하는 이들이 많기 때문이다. “다른 분야에 대해 잘못 얘기했다가 비난받으면 어쩌지?” 하는 두려움이 사람들의 입을 닫고, 다른 분야에 대한 호기심과 넓은 지식을 쌓으려는 노력을 방해한다. 익숙하지 않은 분야라고 해서 아무도 목소리를 내지 않는다면 학문 사이의 소통과 협력은 불가능하지 않을까. 생태학자가 경제 시스템에 대해, 물리학자가 사회현상에 대해 말할 때, 비판은 내용을 대상으로 해야지 발화자의 자격을 문제 삼아서는 안 된다. 주장의 내용에 대한 비판은 얼마든지 환영하지만, 전공 분야가 아닌 다른 분야에 대해 아예 입을 닫으라 강요해서는 안 될 일이다. ‘학문의 자유’는 우리가 지켜야 할 중요한 가치지만 학문에는 자격증이 없어서 ‘학문의 자격’은 어불성설이다. 이 책의 저자 박지형 교수는 두려움 없이 목소리를 내는 사람이다. 저자와 같은 학자가 더 많아지면 좋겠다.

저자는 이 책의 핵심적인 주제 의식으로 “자연에서 민주주의를 배울 수는 없을까?”를 꼽는다.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는 저자의 여정을 안내하는 길잡이가 스피노자의 거미다. 스피노자 사후 16년, 그가 살던 집에 이사 온 루터교 목사 콜레노스는 스피노자의 최초 전기 <스피노자의 삶>을 썼다. 서로 싸우기도 하고 파리를 잡아먹기도 하는 거미를 재밌어하며 바라보는 스피노자의 모습이 전기에 소개되어 있다. 스피노자는 고유한 개인들로 이루어진 다중이 다양한 방식으로 조우하고 협력해 공동의 권력을 형성해 공동의 부를 생산하는, 자연 생태계를 닮은 사회를 꿈꿨다. 그리고 이런 활동의 근본적인 동력이 모든 살아있는 것이 가진 자신의 존재를 지속하려는 본성인 코나투스다. 각자의 코나투스가 모여 조화로운 코나투스의 코러스를 꿈꾼 스피노자는 거미를 보면서 과연 무슨 생각을 했을까? 저자는 스피노자로부터 배우고, 중남미를 침략한 콩키스타도르를 반면교사 삼아, 근대부터 지금까지 이어진 폭력적 자본주의 경제 질서를 넘어, 미래의 생태주의적 경제 질서를 상상하자고 말한다.

미래의 대안적 질서를 상상하고자 하는 저자는 유럽을 중심으로 한 15세기 이후의 역사를 되짚어 보는 것에서 출발한다. 1453년 콘스탄티노플이 함락되자 이탈리아의 동방 무역은 아시아 교역의 봉쇄로 큰 위기를 맞게 된다. 지구는 둥그니까 동쪽이 막혔으면 서쪽으로 나아가 인도에 도달할 일이다. 아라곤의 페르난도 2세와 카스티야의 이사벨 여왕이 힘을 합쳐 이슬람 세력을 축출하고 그라나다 지역을 재정복(레콩키스타)한 1492년, 이탈리아 출신인 콜럼버스는 이사벨 여왕의 후원으로 유럽의 서쪽 대서양을 가로질러 스스로 인도라고 믿었던 신대륙에 도착한다. 이후 레콩키스타에 기여해 영지를 하사받은 카스티야의 하급 귀족 집단 이달고(Hidalgo)는 자신들의 자본과 병력을 동원해 더 큰 부와 명예를 얻고자 콜럼버스의 뒤를 이어 정복자 콩키스타도르가 되어 앞다퉈 신대륙으로 향한다. 잔혹한 폭력을 행사하는 군인 정복자이자 이익을 추구하는 제국 기업가의 면모를 동시에 가지고 있는 이들 콩키스타도르가 수탈한 막대한 부는 에스파냐를 거쳐 전 유럽으로 확산되었고, 이는 중세 봉건제 사회의 붕괴와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의 출범에 기여하게 된다.

1492년 레콩키스타는 에스파냐에서 자자손손 대를 이어 살아가던 유대인에게는 비극의 시작이 된다. 이슬람을 축출한 이사벨 여왕은 가톨릭 이외의 종교를 강하게 탄압하기 시작했고, 에스파냐의 많은 유대인은 포르투갈을 거쳐 타 종교에 관용적인 네덜란드에 정착하게 된다. 스피노자가 바로 이렇게 네덜란드에 정착한 유대인 집안의 후손이다. 평생 독신으로 렌즈 세공사로 생계를 해결하며 살아간 스피노자는 유대인이지만 무신론자였고 결국 유대교에서 파문당한다. 유럽의 근대사가 스피노자의 개인사에 반영되어 그의 삶에 큰 영향을 미친 셈이다.

자신이 지지하는 네덜란드의 공화주의자 얀 더빗이 흥분한 군중에 의해 잔인하게 살해되는 사건이 발생해 스피노자의 철학 사상에 강한 영향을 미쳤다. 저자가 책에서 묻는 첫 번째 질문 “과연 근대는 이성의 시대인가?”에 우리가 고개를 가로저을 수밖에 없도록 만드는 대표적인 사건이다. 스피노자가 살았던 당시의 네덜란드는 그나마 개인의 자유를 추구하는 근대적 인류의 원형을 볼 수 있었던 당시 거의 유일한 곳이었는데도 말이다. 이처럼 근대는 이성의 시대이자 동시에 광기와 폭력의 시대이기도 했다.

근대는 또한 여러 정치철학이 등장한 시대이기도 하다. <리바이어던>을 쓴 홉스는 인간의 자연 상태를 만인의 만인에 대한 전쟁상태로 상정했고 이러한 끝없는 이기적 투쟁을 막기 위해 개인은 각자의 권한 일부를 강력한 정치 공동체(commonwealth)에 양도하는 계약을 통해 사회를 형성한다고 말했다. 홉스와 달리 로크는 자연상태의 개인은 자유롭고 평등하고 이성적이어서 서로의 권리를 인정하지만, 개인 간의 갈등이 발생할 여지가 있어서 계약을 통해 각자의 권리 일부를 정부에 위임하게 된다고 설명했다. 홉스와 로크가 말한 인간의 자연 상태는 서로 달랐고, 계약을 통해 권리를 위임받은 정치 공동체가 행사할 수 있는 권력의 범위도 무척 달랐다. 하지만, 동의에 기초한 사회계약을 통해 국가와 정부가 출현하게 된다는 점에는 둘의 생각이 일치했다. <사회계약론>을 쓴 루소는 홉스와 로크와 달리 자연 상태의 인간은 자유로우며 평등할 뿐 아니라 선한 존재라고 말했다. 인간은 자유롭게 태어난 선한 존재이지만 사유재산이 등장하면서 불평등과 갈등이 발생해 어디에서나 쇠사슬에 묶이게 되었다고 루소는 주장한다. 홉스, 로크, 루소의 자연 상태와 사회계약의 형태는 제각각 달랐지만, 출발점은 하나같이 ‘개인’이다. 스피노자는 달랐다. 개인이 아닌 다중의 집단적 힘을 강조했다. 스피노자 <정치론>의 절대 민주주의는 다중에 의한 자율적 사회 구성에 기반한다.

스피노자의 개인사에 구현된 유럽의 근대사, 스피노자 정치철학의 맹아인 사회계약론의 서구 사상사와 함께 <스피노자의 거미>의 또 다른 중심축이 저자의 전공 분야인 생태학이다. 스피노자의 거미는 스피노자의 공존 철학과 맞물려 생태학에 기반한 저자의 사고로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저자는 책에서 자연생태계의 자원배분은 민주적인지 묻는다. 생태학 분야의 여러 연구를 소개하며 건강한 생태계에서는 소수가 자원을 독점하지 않고 여러 생명 종이 함께 자원을 배분하고 공유해 공존한다는 것을 밝힌다.

토끼와 염소가 같은 지역에서 같은 종류의 풀을 뜯으며 살아가는 상황을 떠올려보자. 이처럼 두 경쟁 종이 동일한 자원을 놓고 경쟁하면 둘 중 한 종만 생존하고 다른 종은 소멸하게 된다는 것이 생태학의 ‘경쟁배제(competitive exclusion)’의 원리다. 나도 대학에서 비선형동역학을 강의할 때 매번 간단한 수리 모형으로 이 원리를 소개한다. 이론상으로는 흠잡을 곳이 전혀 없는 원리지만, 실제 생태계에서는 경쟁배제가 성립하지 않는 상황이 흔히 발견된다. 이를 설명하는 것이 니치의 분화다. 생태학에서 니치는 특정 생물종이 생존하고 번식하기 위해 필요한 환경적, 생물적 조건을 뜻한다. 두 종이 경쟁하는 현실 생태계에서 각 종은 서로 다른 생태적 니치를 점유하는 방식으로 소멸이 아닌 공존의 해법을 저절로 찾아내게 된다. 생태적 니치가 반드시 점유 공간을 뜻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도 중요하다. 내가 얼마 전 방문한 뉴질랜드에서는 양과 소를 같은 풀밭에서 방목한다. 같은 풀밭이지만 소는 주로 풀의 윗부분을 먹고 부드러운 풀을 좋아하는 양은 지면 가까운 풀을 뜯기 때문에, 먼저 소를 방목하고 나서 양을 방목하면 같은 풀밭의 풀로 양과 소를 함께 키우는 것이 가능하다. 같은 풀밭이지만 선호하는 풀의 높낮이가 달라서 양과 소는 각기 다른 생태적 니치를 점유하는 셈이다.

경쟁을 피해 함께 공존하는 또 다른 방법이 있다. 경쟁 배제의 원리를 설명하는 간단한 수리 모형은 두 종의 개체가 위치에 상관없이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다는 ‘완전 섞임’(full mixing) 상황을 가정한다. 하지만 현실은 달라서, 이곳의 염소가 뭘 하는지는 저 먼 곳의 토끼가 뭘 하는지와 무관해 완전 섞임 가정이 성립할 아무런 이유가 없다. 비현실적인 완전 섞임 가정을 버리고 공간 구성을 허락한 여러 이론 연구뿐 아니라 실제 실험에서도, 같은 자원을 놓고 경쟁하는 두 종이 살아가는 장소를 옮겨 함께 공존할 수 있다는 것이 명확하게 알려졌다. 실제 현실의 자연생태계에서는 하나가 멸종할 때까지 경쟁하는 일은 거의 없다. 여기서 경쟁해 살아남기 힘들면 저기로 옮겨가고, 같은 장소라면 먹는 먹이를 바꿔 공존하기도 한다. 현실 생태계는 경쟁 배제의 원리가 아니라 공존의 원리가 주로 지배한다.

공존의 원리가 지배하는 건강한 자연 생태계에서는 극소수의 종이 자원을 독점하는 일도 거의 발생하지 않는다. 소수 종의 자원 독점은 생태계의 건강한 균형이 깨질 때 예외적으로 발생한다. 예를 들어, 유해 물질이 다량 방출되어 극심하게 오염된 하천 생태계에서는 극소수의 종이 엄청난 개체수로 생존하지만 대부분의 종은 살지 못해 사라진다. 한편, 건강한 하천 생태계에서는 여러 종이 다양한 개체수로 생존한다. 건강한 자연생태계를 특징짓는 것은 독점이 아니라 나눔과 공존이다.

저자는 근대 자본주의 체제의 한계를 극복할 대안을 고민한다. 스피노자의 시대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자본주의의 세계화 과정은 유한한 자원이 소수의 손에 독점되어 부와 소득의 불평등이 심화되어온 과정이었다. 시장의 보이지 않는 손이 자원의 효율적 배분을 저절로 보장하리라는 환상에서 벗어나서, 생태계가 보여주는 공존의 원리에 기반한 자원배분의 새로운 원리를 모색하자고 저자는 말한다.

/도서출판 이음

책 제목 <스피노자의 거미>가 담고 있는 여러 의미를 떠올려 볼 수 있다. 파리를 잡아먹는 거미를 보며 정복지 선주민을 학살하는 콩키스타도르를 떠올릴 수도 있다. 하지만 둘은 엄연히 다르다고 저자는 말한다. 콩키스타도르에 의한 선주민의 죽음은 억압에 기반한 ‘내적인 죽음’이지만, 파리의 죽음은 억압이 없는 ‘외적인 죽음’이다. 살아도 사는 것이 아닌 인간의 내적 죽음은 자연 곳곳에서 발견되는 외적 죽음과 본질적으로 다르다. 책 제목에서 거미줄의 모습이 상징하는 연결망을 떠올릴 수도 있었다. 철학, 정치, 역사, 생태학을 종횡무진 연결하고 가로지르는 저자의 저술 방법이 바로 거미줄을 닮았다고 생각했다. 거미줄은 또 생태계의 연결망을 상징할 수도 있다. 모든 생명이 서로 연결된 커다란 자연 생태계 전체의 모습이 바로 복잡하게 얽혀있는 거미줄을 닮았기 때문이다. 저자는 또, 스피노자의 거미를 시인 백석의 거미로 이어간다. 과학과 철학이라는 학문의 대상으로서의 거미에서 출발해서 아름다우면서 동시에 안타까운 바로 지금 여기의 구체적 생명으로 거미를 떠올리는 멋진 문학적 장치다. 모든 학문은 보편적 사고를 지향한다. 학문이 학문이기 위해 어쩔 수 없는 추상화의 과정을 거친다. 하지만, 결과로 얻어진 추상과 보편의 명징한 구조에 감탄하는 것과 함께, 살아 숨 쉬는 자연의 생생한 개별 존재에 대한 애정도 잊지 말 일이다.

*책을 읽고 함께 이야기 나눌 주제

1. 이 책은 과학책 같은 정치학책, 역사책 같은 생태학책입니다. 여러분의 책에 대한 감상평이 궁금합니다.

2. 자연의 민주주의와 인간의 민주주의를 비교해 보세요.

3. 민주주의를 꿈꾸지 않는 생명이 민주주의를 결과로서 만들어 내는 것이 자연생태계의 모습입니다. 인간 사회의 민주주의도 이처럼 자율 구성으로 출현할까요?

4. 자연과 사회의 구성원리를 비교해서 자연으로부터 얻은 교훈을 인간사회에 적용하는 것은 타당한가요? 사실에서 당위를 이끌어내는 오류는 아닐까요?

5. 책의 숙제가 ’화성 식민지에서 대의제 민주주의의 한계를 극복할 새로운 사회계약을 작성하라’입니다. 가장 중요한 원칙을 하나 꼽아보세요.

6. 홉스, 로크, 루소, 그리고 스피노자가 생각하는 인간의 자연상태를 비교해 보세요.

7. 자연생태계의 보이지 않는 손은 무엇인가요?

8. 철강왕 카네기와 같은 자본가들은 무한 경쟁이 자신들 뿐 아니라 인류의 진보를 위해서도 불가피하다고 주장합니다. 이를 비판하는 저자의 논지는?

9. 제국주의가 폭력적으로 식민지를 찬탈한 잘못은 있지만 식민지의 평화와 번영에 기여한 것도 인정해야 한다는 주장에 대한 여러분의 의견이 궁금합니다.

10. 생태계의 자율적 질서는 드러나기 전에 내재하는 것인가요? 자율적 질서는 생태계 작동의 원리인가요, 결과인가요?

11. 시민과 다중은 무엇이 다를까요? 저자와 스피노자는 왜 시민이 아닌 다중이 민주주의 정치의 주체가 되어야 한다고 말할까요?

12. 바로 지금, 이성이 잠들어 깨어난 괴물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