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민트’, 혁명을 수출하는 제국의 운명 [김경훈의 시네노믹스]

2026-03-05     김경훈 칼럼니스트
영화 ‘휴민트’의 한 장면. /사진=(주)NEW

대혁명 이후 나폴레옹 시대의 프랑스, 소비에트혁명 이후 소비에트 체제의 러시아, 회교혁명 이후 신정체제의 이란 등등 이들의 공통점은 모두 혁명의 이념이나 가치를 전파 혹은 퍼뜨리며 제국이 되었다가, 혁명주도 세력의 부패 혹은 이념 자체의 비효율성에 발목을 잡히고 제국은 결국 파탄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혁명의 이념을 수출한다는 것은 교조적인 정치 체계의 구축을 의미하기도 하는 경우가 많고, 과잉되고 발진(發疹)한 신념이 필요 이상으로 오래 지속되면 부패로 이어지게 마련이다. 그리고 우리는 새롭게 발호하는 정치의식과 포퓰리즘의 결합체인 ‘MAGA’(Make America Great Again,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 마가)의 정치운동이 세계의 여러 나라와 상동성을 갖고 공진(共振)하고 있음에 주목해야 한다.

트럼프는 고립주의를 표방하고 있지만, 그의 정치 행동양식은 제국의 행위자 연결망(Actor Network)을 통해 영향력을 행사하며 미 제국주의의 작동방식에 마가라는 정치신념을 추가하는 적극성을 띄고 있다. 다른 말로 복음주의의 기독교 근본주의를 바탕으로 하는 신앙심과 국수주의를 결합해 좀 더 완고한 제국의 행위자 연결망을 형성하려 하고 있는 것이다.

혁명 이념을 수출하는 것에 괘념치 않고 제국을 건설하였음에도 새삼스럽게 종교적 신념체계를 동원하는 행위자 연결망이 구축되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현상은 제정 나폴레옹 시대의 반동과 소비에트 연방 시대의 무기력감, 신정 체제를 끌고 온 이란의 부패처럼 말기적 현상이다.

따라서 우리는 미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국수주의의 발호와 제국의 주변부 국가에서 이에 호응하고 있는 모습(이전 검찰정권, 일본의 다카이치 정부, 아르헨티나의 밀레이 정부, 이탈리아의 멜로니 정부, 필리핀의 마르코스 정부처럼)에서 이란 회교혁명의 명백한 쇠퇴와 같은 역사적 맥락을 감지할 수 있는 것이다.

또한 서방세계가 신화나 미신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게 했던 근대 이성의 합리성이 이제는 전체주의 세력이 견강부회하는 수단으로 전락했다고 의심받는 와중에, “낮은 데로 임하소서” 같은 종교의 ‘돌봄과 주의’ 기능이 여전히 유효하고 그것이 전 지구적 기후위기에 대응하는 생태주의 운동의 새로운 동력이지 않을까 반신반의하는 국면에서, 오히려 맹신이나 미신적 요소가 가미된 형태로 종교가 정치권력과 결탁하는 것은 아이러니한 일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옛 소련의 팽창과정에 등장한 북한에서 이미 무너진 사회주의의 이념적 광휘를 메꾸고 있는 것은 오히려 사회적 약자인 여성 노동자의 희생임을 그리고 있는 것이 ‘휴민트’이다.

언제나 인간의 기획은 신의 의도를 파악하는데 늦기 마련이고, 시장의 반응을 예측하는 데는 충분하지 못하다. 현재의 균형 역시 수많은 연기(緣起)의 결과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인간은 블라디보스토크의 차가운 얼음장 아래 가라앉더라도 생존을 위해 후대를 위해 총을 든다.

우리는 언제나 기대하고 있었다. 언젠가 북한의 체제도 변하겠지, 변하는 날이 오겠지 하면서도 늘 무거운 짐처럼 다가오는 것은 그때까지 버텨야 하는 북한 인민들의 삶이다. 마찬가지로 자본주의 사회의 절정을 향해 가고 있는 우리들 또한 모든 비인간적인 노고와 차별로부터 버텨내야 한다.

<휴민트>를 ‘단독 강화’류의 영화라고 보기는 어렵다. 하지만 찰나적인 연대 또한 존재했었으니 간단하게 교감이라고 하자. 우선 조 과장이 채선화와 라포르(rapport)를 형성하는 과정에서 만들어진 교감은 필연적이다. 선택의 여지가 없다. 주체로서 상징계에 드리워진 얼룩은 더 이상 번져나가지 않는다.

하지만 박건에게 맺혀진 얼룩은 혹은 채선화와의 사이에서 틀어진 원죄는 시간이 지날수록 커지게 마련이다. 비록 임대리와의 사이에서 우리가 숨죽이며 바랐던 휴전이 이루어졌다고 하더라도 채선화에게 빚진 일은 벗어날 수 없는 속박이다. 그 결핍을 채우기 위해서는 스스로 거세하든지 아니면 숭고한 죽음을 택하든지 해야 한다.

인간 주체가 세계 앞에서 타자와 교호하며 초월적 실체를 끌어들여 세계를 침범할 때 그는 사실 세계를 지켜내는 것과 같은 역할을 수행한다. 따라서 박건이나 <베를린>의 표종성은 사실 북한 주민들이 그렇다고 믿고 있는 공화국을 방어하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다. 피의 대학살 이후 이란을 진정 수호하는 것이 혁명수비대인지 시위대인지 구별하기 어렵듯이.

“박건이 죽기 전에 건넨 말이 채선화를 보살펴 달라는 말이었냐?“라는 임 대리의 물음에 “아니, 살고 싶다. 살 방법이 없냐?라고 물었다”라는 조 과장의 답은 누가 봐도 거짓이다. 그 역시 박건에게 나름의 라포르를 형성하게 됐을 가능성이 크고 이를 드러내지 않기 위해 사실과 다른 말을 한 것으로 보인다. 그가 인트로와 다르게 단출한 숙소에서 헤아릴 수 없는 무게를 짊어진 어깨를 감추지 못하는 것을 보면 그렇다.

류승완은 어쩌면 더 이상 북한을 소재로 한 영화를 만들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조 과장의 짐 진 어깨처럼 그의 피로감이 느껴진다. 북한 문제는 단순하지 않다. 주택가격 안정화 정책처럼 고차방정식과 인내력을 필요로 한다. 주택가격이 외부 쇼크에 의해 상당 기간 하락세를 보이는 경우가 있는 데 비해, 북한문제는 처음부터 외세의 개입으로 발생한 문제이기 때문이다.

36년 만의 개기 월식처럼 수십년을 기다려 아주 잠깐 달빛이 감춰졌을 때, 수많은 당사자의 눈을 가리고 우리의 목적인 통일을 달성해야 하는데, 그때 우리가 경계해야 하는 것은 일본의 열패감, 중국의 초조감, 미국의 불안감이다. 그리고 우리가 주시해야 하는 것은 정체성이 굴절되어 대의를 향유하지 못하고 환상을 횡단하지 못하는 내부의 적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