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덤을 거부한 물리학자 ‘아인슈타인’ [김범준의 세상물정]

이강영 교수의 ‘아인슈타인’

2026-02-13     김범준 편집위원(성균관대 교수)
아인슈타인. /사진=클립아트코리아

경상국립대학교 물리교육과 이강영 교수가 최근 출판한 전기 <아인슈타인>이 오늘 소개할 책이다. 물리학자가 쓴 물리학자의 전기, 게다가 한국인 저자가 우리말로 펴낸 책은 드물다. 저자 이강영 교수는 아인슈타인의 인생을 관통하는 삶의 태도를 ‘권위에 대한 본능적 거부감과 반항심’으로 요약한다. 아인슈타인의 개인적 삶과 학문적 성취를 설명하는 중요한 관점이다. 저자 이강영 교수는 이 책이 ‘자연을 이해하는 관점이 어떻게 발전하고 성숙해 갔는지를 보여주는 한 물리학자의 역사’라고 했다. 어떤 사람도 그가 속한 시대와 동떨어질 수 없다. 한 물리학자의 역사를 담고 있지만, 격변의 20세기 전반기의 생생한 시대의 모습도 함께 엿볼 수 있는 멋진 책이다. 미국의 <타임>은 모든 분야를 망라해 20세기를 대표하는 가장 중요한 인물로 아인슈타인을 선정했다.

아인슈타인이 학생 시절 성적이 좋지 않았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 가톨릭 계열 초등학교 시절의 성적은 늘 최상위권이었고, 루이트폴트 김나지움에 다니던 시절 수학과 과학 성적은 아주 뛰어났다. 단지, 라틴어와 그리스어 등 인문학 과목에는 그리 관심을 두지 않아 우수한 성적이 아니었을 뿐이다. 유대인은 가난한 이웃을 초청해 매주 한 차례 같이 식사하는 공동체의 전통이 있다. 김나지움 시절 아인슈타인 집안을 정기적으로 방문한 막스 탈무트는 소년 아인슈타인의 수학적 재능이 너무나도 대단했다고 회고했다. 또, 아인슈타인 본인도 열다섯 살이 되기 전에 미적분학을 스스로 공부해 다 끝냈다고 밝히기도 했다. 13세 때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을 좋아해 탐독했다는 일화, 바이올린 개인 교습에 처음에는 큰 흥미를 느끼지 못하다가 10살 때 모차르트 소나타를 접하고는 음악에 매료되어 평생 바이올린을 연주한 아인슈타인의 모습을 통해서도, 어떤 주제든 일단 흥미를 가지게 되면 놀라울 정도의 열정과 집중력을 가진 어린 아인슈타인을 볼 수 있다. 이강영 교수의 책과 함께 읽은 제레미 번스타인의 <아인슈타인: 어떻게 상대성이론을 알아냈을까?>는 또 다른 일화도 소개한다. 삼촌 야코프는 피타고라스 정리를 알려주며 12살 아인슈타인에게 증명해 보라고 했다. 어린 아인슈타인은 삼각형의 닮음과 직각 삼각형의 면적이 빗변의 제곱에 비례한다는 것을 이용해 멋지게 피타고라스 정리를 증명했다. 간결하고 멋진 증명 방법을 스스로 찾아낸 12살 소년 아인슈타인의 모습이 놀랍다.

김나지움 시절 아인슈타인의 부모는 뮌헨에서의 사업이 어려워지자 이탈리아의 밀라노로 옮겨 사업을 이어갔다. 홀로 뮌헨에 남아있던 15세의 아인슈타인은 김나지움을 그만두고 불쑥 밀라노의 가족을 찾아가고 그곳에 머물면서 독일 국적을 포기하게 된다. 독일 군대에 입대하는 것을 피하고자 꼼꼼이 준비하고 계획한 일이었다고 저자 이강영은 설명한다. 어린 시절부터 아인슈타인이 자주 보여준 군대로 대변되는 폭력에 대한 반항을 보여주는 사건일 뿐 아니라, 어린 학생이 스스로의 신념을 지키기 위해 부모와 의논 없이 스스로 계획하고 결행한 일이었다는 것도 놀랍다. 이후 아인슈타인은 김나지움 졸업장이 없어도 시험에 합격하면 진학할 수 있는 취리히의 폴리테크니쿰에 입학하고자 했지만 실패한다. 입학시험에서 수학과 과학에서는 아주 뛰어난 성적을 거두었지만 역사와 프랑스어 과목에서 낙제했기 때문이다. 좋아하면 열심히, 좋아하지 않으면 공부를 게을리하는 아인슈타인의 면모를 다시 확인할 수 있는 일화다. 참고로 폴리테크니쿰은 이후 취리히 연방 공과대학교(ETH)로 이름을 바꿨다. 현재 유럽을 대표하는 유명 이공계 대학교다. 입학시험에 떨어진 아인슈타인의 수학과 과학 실력에 강한 인상을 받은 폴리테크니쿰의 학장 헤어초크의 권유로 아인슈타인은 아라우 칸톤의 학교에 진학하게 된다. 강압적 분위기였던 초등학교와 김나지움 시절에는 학교 교육에 크게 실망했던 아인슈타인은 이 학교의 분위기를 정말 좋아했다고 한다. 공화주의 교육을 이념으로 한 이 학교에는 우수한 교사가 많았다. 특히 이 학교 교사이자 평화주의자인 요스트 빈텔러 집에서의 하숙 생활의 경험이 아인슈타인의 평화주의 세계관에 큰 영향을 미쳤다고 할 수 있다.

아라우 칸톤 학교에서 멋진 1년을 보낸 아인슈타인은 전체 2등이라는 뛰어난 성적으로 졸업해 폴리테크니쿰의 ‘수학과 자연과학 전문 교수 과정’에 입학한다. 같은 과정에 함께 입학한 5명의 동급생 중 하나가 바로 아인슈타인의 첫 번째 아내인 밀레바다. 세르비아 출신의 촉망받는 여학생 밀레바가 유럽에서 여성의 대학 입학이 가능한 곳을 찾아 취리히의 폴리테크니쿰에 입학한 것이다. 아인슈타인은 폴리테크니쿰에서의 대학생 시절 물리학 이론 교수 베버의 강의에 열광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베버 교수가 현대적인 물리학 이론을 강의하지 않는 것에 불만을 품게 되었다. ‘베버 교수님’이 아니라 ‘베버 씨’라고 부르는 등의 일탈 행위로 베버와의 관계가 악화된다. 몇 교수와의 나쁜 관계 때문인지, 5명 동급생 중 4등으로 졸업한 아인슈타인은 공부와 연구를 계속하기 위한 조수 자리를 얻지 못해 한동안 어두운 시절을 보내게 된다. 5등 밀레바의 사연은 더 안타깝다. 밀레바는 독일의 하이델베르크 대학교의 청강생으로 한 학기를 보내고 폴리테크니쿰에 돌아왔지만 6개월의 학업 공백을 결국 메우지 못해 졸업시험에 연이어 실패하게 되어 학자의 꿈을 접게 된다. 만약 밀레바가 공백 기간 없이 계속 폴리테크니쿰에서 학업을 이어가 무사히 졸업했다면, 아인슈타인과의 결혼 생활과 자신의 삶을 더 행복하게 누리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에 안타까웠다.

/아르테

1901년 아인슈타인의 상황은 무척 좋지 않았다. 졸업 후 대학에서 조수 자리를 구하고자 애썼지만 실패했고, 아직 결혼하지 않은 밀레바는 아이를 임신했고, 안정적인 직업도 없고, 부모와의 관계도 나빴다. 이때 폴리테크니쿰의 동급생 그로스만이 도움의 손길을 내밀어 베른의 특허청 심사관 자리를 알아봐 준다. 베른으로 옮긴 아인슈타인은 특허청 취업 이전 시기에 생활비를 벌기 위해 신문에 개인 교습 광고를 냈다. 이를 보고 찾아온 솔로빈과 여러 분야에 대한 깊이 있는 대화를 나누고 하비히트와 함께 셋이서 ‘올림피아 아카데미’라는 모임을 만들게 된다. 아인슈타인이 궁금해한 캐비어를 생일날 준비한 친구들 앞에서 물리학에 대한 논의에 집중했던 아인슈타인은 자신이 캐비어를 먹는 줄도 몰랐다는 재밌는 일화가 전해진다. 관심을 가진 주제에 엄청난 집중력을 보여주는 아인슈타인의 모습을 다시 볼 수 있다. 1902년 특허청에 취업한 아인슈타인은 베른에서 행복한 시절을 보내게 된다. ‘올림피아 아카데미’에서의 깊고 다양한 지적 토론과 여러 각도에서 문제를 생각하는 경험을 제공한 특허청 심사관의 일이 물리학에서 아인슈타인이 거둔 이후의 놀라운 성과에 큰 도움을 주었음이 분명하다. 올림피아 아카데미의 두 멤버를 증인으로 1903년 밀레바와 결혼한 아인슈타인은 1904년 첫아들 한스를 낳았다. 이어서 기적의 해 1905년이 다가왔다.

1905년 아인슈타인은 3월부터 6월 사이에 세 편, 그리고 9월 말 네 번째 논문을 학술지에 제출한다. 이 네 편의 논문에 담긴 연구는 지금 봐도 믿기지 않을 정도로 엄청나다. 3월에 제출한 광전효과에 대한 논문은 빛의 에너지가 연속적이지 않아 띄엄띄엄하다는 가정을 적용해서 쬔 빛의 세기가 아니라 빛의 파장이 광전효과를 결정한다는 것을 보였다. 양자역학의 초기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한 논문이다. 5월에 제출한 논문은 액체에 떠 있는 입자가 움찔움찔 움직이는 브라운 운동에 대한 것이다. 원자가 실재한다는 원자론을 전제로 해서 브라운 운동을 정량적으로 설명해 통계역학 분야에 크게 기여한 논문이다. 시간과 공간에 관련된 완전히 새로운 물리학인 특수상대성이론의 탄생을 알린 논문은 6월 말에 제출된다. 전혀 다른 세 분야에서 놀라운 연구 업적이 몇 달 안에 완성된 것은 정말 경이로운 일이다. 1905년을 물리학자들이 아인슈타인의 ‘기적의 해’라고 부르는 이유다. 마지막인 네 번째의 짧은 논문에는 유명한 방정식 E=mc²이 담겨있다. 특수상대성이론을 세상에 알린 세 번째 논문에서 어렵지 않게 유도할 수 있는 결과다. 네 번째 논문은 세 번째 논문의 짧은 부록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세 번째 논문을 제출한 아인슈타인이 “아, 맞다. 이 얘기도 할 수 있었는데…” 하는 뒤늦은 생각에 빠르게 짧게 작성해 제출한 논문이랄까.

놀라운 여러 논문을 단기간에 출판한 아인슈타인은 물리학계에 이름을 널리 알렸고, 이후 학자로서의 아인슈타인은 성공 가도를 달리게 된다. 1909년 취리히대학교 조교수가 되었고, 1911년에는 프라하의 카를 페르디난트 대학교 정교수로 부임한다. 곧이어 1912년 폴리테크니쿰 정교수로 취리히로 돌아온 아인슈타인은 1914년 베를린 대학교 정교수, 프로이센 아카데미 회원, 그리고 카이저빌헬름 물리학 연구소 소장으로 베를린 생활을 시작해 1932년 미국으로 떠날 때까지 19년을 머물게 된다.

특수상대성이론의 완성에는 빛의 속도에 대한 고민이 중요했다. 16세의 어린 시절 아인슈타인이 생각한 사고실험이 있다. 빛의 속도로 앞을 향해 움직이는 빛의 파동을 생각하자. 만약 내가 빛과 같은 속도로 앞으로 나아가면 내게 빛의 파동은 정지해 있는 것으로 보일 수밖에 없다. 고전역학의 상대속도 개념으로 쉽게 얻을 수 있는 자명한 결론이다. 만약 이 결론이 맞다면 심각한 문제가 발생하게 된다. 갈릴레오는 일정한 속도로 움직이는 배에 탄 사람은 배 안에서 일어나는 물리 현상에 대한 관찰만으로는 자신이 탄 배가 움직이는 속도를 결코 알 수 없다는 것을 알려주었다. 바로 물리학에서 상대성의 원리라고 부르는 일반적인 원리다. 그런데 위에서 소개한 소년 아인슈타인의 사고실험에 따르면, 점점 속도를 높이며 앞으로 달리는 관찰자는 빛이 정지한 것으로 보이는 순간 자신의 속도가 빛의 속도와 같다는 사실을 알아낼 수 있다. 갈릴레오가 말한 상대성의 원리를 위반하는 결과다. 결국 위에서 소개한 아인슈타인의 사고실험에서, 움직이는 사람이 측정한 빛의 속도는 정지한 사람이 측정한 빛의 속도와 같아야 한다. 빛의 속도로 움직이는 관찰자가 본 빛의 속도가 정지한 사람이 본 빛의 속도와 같아야 한다는 신기한 결과다. 등속으로 움직이는 관찰자가 측정한 빛의 속도는 자신의 속도에 무관해 일정하다는 것, 그리고 모든 물리법칙은 등속으로 움직이는 관찰자의 속도에 무관하다는 갈릴레오가 말한 상대성의 원리를 함께 가정하는 것이 특수상대성이론의 출발점이다. 이처럼 등속 운동하는 관찰자에게 광속과 물리법칙이 똑같다는 것을 가정하면 약간의 수학적 과정을 거쳐 움직이는 사람의 시간은 느려지고 이 사람이 본 목적지까지의 거리는 줄어든다는 것을 그리 어렵지 않게 보일 수 있다.

특수상대성이론을 완성한 아인슈타인의 다음 고민은 바로 등속으로 움직이는 관찰자를 가정한 특수상대성이론을 일반화하는 것이었다. 일정한 속도로 움직이는 관찰자가 보는 물리법칙을 알아낸 아인슈타인이 가속하는 관찰자에게 보이는 물리법칙은 어떤 꼴이 될지 고민하기 시작한 것이다. 아인슈타인이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생각이라고 말한 재밌는 사고실험이 있다. 높은 곳에서 중력의 영향만을 받아 아래로 자유낙하하는 사람은 낙하하면서 아무런 중력도 느끼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가속하는 관찰자가 느끼는 관성력이 중력과 동일하다는 것을 아인슈타인이 깨달은 것이다. 결국 가속하는 기준틀로 특수상대성이론을 일반화한 일반상대성이론은 중력에 대한 이론이 된다.

일반상대성이론이 완성되어 처음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1915년 11월 아인슈타인과 수학자 힐베르트 사이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 이강영 교수의 이번 책에서 새로 알게 된 얘기가 재밌다. 가속하는 기준틀도 포함하는 일반공변성 원리에 기반해 일반상대성이론을 만들어내고 이를 이용해 수성의 근일점 이동을 설명한 아인슈타인은 11월 25일 아카데미에서 자신의 연구 결과를 발표했다. 한편, 힐베르트가 일반상대성이론에 관련된 논문을 써서 아인슈타인에게 보낸 것은 11월 18일, 논문을 학술지에 투고한 것은 아마도 11월 20일쯤이다. 그렇다면 아인슈타인이 아니라 힐베르트가 일반상대성이론의 최초 완성자가 아닐까? 이강영 교수는 그렇지 않다고 설명한다. 힐베르트는 투고한 논문을 이후 교정했는데, 교정의 시점이 아카데미에서의 아인슈타인 발표 이후이기 때문이다. 즉, 힐베르트의 논문을 보고 아인슈타인이 장방정식을 완성한 것이 아니라, 아인슈타인의 발표에서 장방정식을 접한 힐베르트가 며칠 전에 투고한 논문을 교정해서 다시 제출했다는 것이 실제 벌어진 일이라는 얘기다. 힐베르트 스스로도 일반상대성이론의 완성에서 아인슈타인에게 우선권이 있다는 것을 기회 있을 때마다 인정했다고 한다.

아인슈타인의 일반상대성이론은 당대에 관측으로 이미 알려져 있던 100년에 43초 각도의 수성 근일점 이동을 정량적으로 올바로 설명했다. 이와 함께 일반상대성이론의 승리를 세상에 널리 알린 것이 1919년의 개기일식 때 확인된 별빛이 휘는 현상이다. 질량이 큰 물체 주변을 움직이는 빛의 경로가 휘는 것은 일반상대성이론뿐 아니라 뉴턴의 고전역학에서도 얻을 수 있는 결과다. 하지만 일반상대성이론이 1.74초 각도의 휨을 예측하는 것과 달리 뉴턴역학은 그 절반의 각도를 예측한다. 1919년의 일식 때 확인된 것은 별빛이 휜다는 사실뿐 아니라 측정된 각도가 일반상대성이론의 예측 결과와 잘 부합한다는 것이었다. 1919년 11월 영국의 일식 원정대의 보고회에서 발표된 이 결과가 언론에 널리 보도되면서 아인슈타인은 당대 대중에게 가장 유명하고 인기 있는 물리학자로 우뚝 서게 된다.

베를린에서 유대인에 대한 차별이 심해지던 1932년 아인슈타인은 미국을 방문한다. 그리고 방문 기간 중 나치는 아인슈타인의 베를린 아파트를 습격한다. 일단 미국에서 유럽으로 출발한 아인슈타인은 벨기에의 독일 영사관에서 독일 국적을 포기하고 사직서를 프로이센 아카데미에 보낸다. 1933년 미국의 프린스턴 고등연구소로 옮겨 사망할 때까지 이곳에 머물게 된다.

외부의 권위를 거부하고 반항했던 아인슈타인은 자신이 권위자가 되거나 추앙과 숭배의 대상이 되는 것을 원치 않았을 것이 분명하다. 그가 “운명은 권위를 멸시하는 나를 벌주기 위해 나를 권위자로 만들어 버렸다”라고 했듯이 말이다. 권위를 싫어했지만, 권위자가 되었고 사망 후 무덤을 만들지 말라고 당부했을 정도로 숭배의 대상이 되는 것을 싫어했지만, 육필 원고가 엄청난 가격에 거래되는 숭배의 대상이 되고 말았다. 언뜻 탄탄해 보였던 고전 물리학의 토대에 놓인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 태도로 상대성이론이라는 새로운 물리학을 만들어냈지만, 말년에는 양자역학이라는 새로운 물결에 거스르는 시대에 뒤떨어진 태도를 보이기도 했다. 독일 국적을 스스로 포기할 정도로 군대로 대변되는 국가 폭력에 반대했지만, 2차 세계 대전이 일어나자, 독일에 맞서 미국의 핵무기 개발 필요성을 강조하는 편지를 미 대통령 루스벨트에게 보내기도 했다. 유대인 정체성을 거의 갖지 않고 성장했지만, 베를린 시절 유대인에 대한 폭력적 탄압을 보며 유대인이라는 정체성을 뒤늦게 깨달아 시오니즘에 적극 동조하기도 했다. 모든 이의 삶이 그렇듯, 아인슈타인의 삶도 여러 실타래가 얽히고설켜 단순하지 않으며 일견 모순적인 모습을 보여주기도 한다. 이강영 교수의 멋진 책이 보여주는 아인슈타인의 복잡하고 생생한 모습이다.

*책을 읽고 함께 이야기 나눌 주제

1. 젊은 아인슈타인은 물리학의 여러 분야에서 정말 놀라운 업적을 만들어냈어요. 이런 놀라운 물리학자가 다시 또 등장할 수 있을까요?

2. 아인슈타인은 전통을 존중하면서도 권위에 도전하기도 했어요.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에서 어떤 것은 존중하고 어떤 것은 거부할지 결정하는 기준이 있을까요?

3. 시대의 한계를 뛰어넘으려 한 용감한 여성 밀레바의 삶은 행복하지 않았어요. 밀레바 인생의 몇 고비에서 여러분이라면 어떤 선택을 하시렵니까?

4. 아인슈타인이 재능을 활짝 꽃피워 놀라운 업적을 만들 수 있었던 요인으로는 어떤 것이 있을까요? 아인슈타인 개인의 능력 외에 주변 환경과 시대 배경을 중심으로 들려주세요.

5. 아인슈타인과 힐베르트 사이에 있었던 일반상대성이론의 우선권에 대한 얘기가 재밌더군요. 논문 제출과 학회 발표뿐 아니라, 연구 노트, 언론 공개, 사적인 편지 등 연구가 세상에 알려질 수 있는 여러 방법이 있습니다. 연구 업적 우선권의 기준은 어떤 것일까요?

6. 질량이 에너지로 변환된다는 것을 보인 아인슈타인은 핵폭탄 개발에 책임이 있을까요?

7. 아인슈타인은 시온주의자이자 세계주의자라고 할 수 있어요. 이 둘은 서로 모순일까요?

8.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독일 핵무기 개발을 경고한 아인슈타인이 핵폭탄을 만들어낸 맨해튼 프로젝트에 참여하지 않은 이유는 무엇일까요?

9. 기독교적 인격신을 믿지 않은 아인슈타인은 우주의 질서를 대표하는 ‘오래된 존재’를 말했어요. ‘오래된 존재’는 어떤 의미일까요?

10. 아인슈타인이 한 말 “신은 난해하지만 심술궂지는 않다”라는 무슨 뜻일까요? “신은 주사위 놀이를 하지 않는다”라는 어떤 의미일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