케인지안과 생태주의자의 꿈 [김경훈의 시네노믹스]
영화 ‘기차의 꿈’
우리 모두가 다시 한번 케인지안(Keynesian, 1930년대 대공황 극복을 목적으로 경제학자 케인스가 제안한 이론으로, 정부 역할을 강조하는 수요 중심 경제 모델)이 될 가능성이 점점 더 커지고 있다. 순환 주기의 문제가 아니라 구조적인 문제에 노출되어 있다고 보인다. 기술혁신이 반드시 고용 상황을 악화시키지는 않지만, 산업혁명이라고 부를 만한 과학기술의 진전이 있는 경우에는 대규모 실업이 발생하고 그것은 만성적인 수요 부족으로 이어졌다.
수차례 언급한 20세기 초의 전기·전신·전화, 철도·자동차·항공기 등으로 이어지는 시간과 공간의 압축은 초기의 과잉된 설비투자가 불가피하고 반드시 압축의 대가를 받아낸다. 1930년대의 대공황이 결국 금융·통신·교통·관광·영화 등의 서비스산업에서 실업예비군을 수용하게 했지만, 케인스의 유효수요에 숨통을 틔워준 것은 우선 정부지출이었다.
그에 비해 최근 30년간 이루어진 정보혁명 과정은 개별 기업의 ‘도태’(코닥의 필름카메라가 DSLR로 대체되듯이, 노키아의 셀폰이 스마트폰으로 대체되듯이)로 귀결되는 수많은 사례를 만들어냈지만, 제조업체 간 교체든 서비스산업의 확대든 실업은 상대적으로 관리 가능한 2차 의제였다.
그리고 이제 우리를 불안하게 만드는 것은, 정보혁명의 최종판이라고 할 수 있는 AI 혁명에 깃든 자본가들의 본원적인 욕망이 임금과 좀 더 통제하기 쉬운 노동 즉, 노동의 자본으로의 완전한 대체를 향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는 닷컴 버블과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를 ‘연준’(미국 연방준비제도)이라는 형식상 정부 밖 조직이 금리와 양적완화를 통해 안정화함으로써 자본이득을 최대화하면서 기축통화의 지위를 지켜냈고, 중국이라는 새롭게 세계 자본주의 경제 시스템 내에 편입한 세계의 공장이 인플레이션을 흡수함으로써 노동자들의 소비수준을 유지할 수 있었다.
하지만 트럼프 시대의 방향성에는 실업과 소비라는 국민경제의 양대 과제와 ‘트리핀의 역설’처럼 기축통화국의 숙명이라는 무역적자 간의 모순관계를, 관세와 국경선이라는 2개의 장벽만으로 막아낼 수 있다고 버티는 단순 명쾌함만 있다.
우리는 또 어떠한가, 과학기술 패러다임의 전환기 공급과잉에서 비롯된 대량 실업이나 AI 시대의 필연적인 일자리 박탈 외에도 코로나19 시대 집합 금지 등에서 현실화한 구매 패턴의 변화로 인한 소비 점포의 소멸, 검찰 정권의 무능에서 비롯된 PF 부실 처리와 부동산시장 구조조정의 지연 등이 가져오는 필연적인 소비 위축, 다가오는 인구절벽에 눈 감고 있는 근시안적 위기의식이 직면하게 될 장기적인 소비 감소가 재벌기업들의 투자나 정부지출의 증가로 메꾸어질 수 있다고 보기 어렵다.
<기차의 꿈>은 1910년대 후반 미국 전역에 철도가 개설되면서 동원되는 철도 공사나 벌목 공사 현장의 노동자 이야기이다. 할리우드가 여전히 이 정도의 영화를 만들 수 있다는 것은 부럽기까지 하다. 역사가 일천한 미국이 적어도 자본주의의 생톰(sinthome, 잔여 증상)인 공황을 다루고 변주하는 솜씨는 깊다. 그만큼 여러 측면에서 공황에 대한 정서적·심리적 대비가 국가와 기업, 개인들에 이르기까지 잘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기차의 꿈>은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사회의 대격변인 공황에서 빗겨나 자유로와 보이는 떠돌이 벌목공의 시선으로 인간과 자연의 길항적인 모순관계가 발톱을 드러내는 생태 문제를 주로 다루고 있다.
평범한 사람의 눈으로도 평범한 노동자의 눈으로도 평범한 벌목공의 눈으로도 만물에 영(靈)이 있음을 감지한다. 카르마가 인간과 자연(혹은 사물, 비인간) 사이에도 당연히 형성된다는 것을 인식하고 받아들이게 된다.
기후 문제가 ‘절대 선’ 혹은 정치적 올바름에 해당하지는 않을지라도 ‘가이아 가설’(Gaia hypothesis, 지구는 세포조직으로 이루어진 하나의 생명체처럼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가설)이 허황한 논리만은 아니라는 인식을 해야 비로소 ‘석과불식’(碩果不食, 자기의 욕심을 버리고 복을 넘겨줌)에 이르게 된다. 수백년 된 나무를 다 자르더라도 다시 그만큼의 나무가 자라고 있을 거라는 편리함은 산업혁명 이전에나 유용한 사고다. 전기톱이 출현한 순간, 마치 기관총이 전장에 나타나 대량 학살을 저지르듯이 산림에 대한 파괴는 정해진 체념이 되어버린다.
로버트가 아내와 아이가 사라진 자리에 그대로 오두막을 짓고 살다가 숲속에 남아있던 아내의 사념(思念) 한 조각과 마주쳐 교감하는 장면은 환상에 불과한 것일 수도 있지만, 초자연적 현상은 실제로 벌어지는 일이기도 하다. 인간의 의지가 자연의 순리를 뒤틀어버리기도 하듯이 자연 현상이나 비인간의 작용이 인간세계에 현실적인 힘을 가하기도 하기 때문이다.
<기차의 꿈>은 아름답다. 수십 년간 숲에서 은둔자의 삶을 보내게 된 것은 아내와 딸을 다시 만날 수 있다는 기대감 때문이겠지만, 환상을 넘어 자연 자체와 접속함으로써 자연을 향한 인간들의 오랜 경외심에 새로운 답을 제시한다.
모든 혁명은 궁극적으로 상호존중과 대칭성을 향해 전진한다. 그 탐색과정은 저마다의 길을 헤쳐 나가는 것이겠지만, 어느 날 ‘월인천강’(月印千江)처럼 확연히 몸에 새겨진 혁명의 꼬리표가 결국은 사회 전체의 상징체계임이 드러나는 순간을 마주한다.
이미 우리에겐 케인지안과 생태주의자의 상호 모순된 인식이 내장되어 있다. 소비를 둘러싼 두 인식 체계가 조화를 이루는 경우가 많지는 않지만 가능하다. 예를 들면, 열풍건조-분쇄식 음식물 처리기를 보급할 때 정부가 보조금을 지급하는 경우이다. 정부가 보조금을 지원해서 소비의 문턱을 낮추면, 제조업체는 기술개발을 통해 가격을 낮추거나 품질을 높일 수 있고, 소비가 늘면 쓰레기 매립장 문제나 환경오염 문제를 상당 부분 완화할 수 있다.
누군가 숲에 은둔하고 옛사람을 그리기만 할 뿐 시간을 헛되이 보내는 것처럼 보이더라도 그가 자연 친화적인 합리적 소비를 하고 자원을 낭비하지 않는다면, 더하여 그가 숲 해설사가 되어 관광객이 만족한다면, 그는 가장 현대적인 사람이라고 할 만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