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하는 모든 것은 우연과 필연의 열매 [김범준의 세상물정]

자크 모노의 ‘우연과 필연’

2026-01-12     김범준 편집위원(성균관대 교수)
“옛날의 결속은 깨어졌다. 인간은 마침내 그가 우주의 광대한 무관심 속에 홀로 내버려져 있음을, 그가 이 우주 속에서 순전히 우연에 의해서 생겨나게 되었음을 알게 되었다. 이 우주의 그 어디에도 그의 운명이나 의무는 쓰여 있지 않다. 왕국을 선택하느냐 아니면 어둠의 나락으로 떨어지는 것을 선택하느냐 하는 것은 전적으로 인간 자신에게 달려 있다.” /사진=클립아트코리아

<우연과 필연>은 1965년 노벨 생리 의학상을 수상한 자크 모노의 명저다.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우연과 필연의 열매”라는 그리스 철학자 데모크리토스의 말이 책을 관통하는 중심 주제이자 저자가 책 제목을 <우연과 필연>으로 정한 이유다. 1960년대 말 자크 모노의 강의를 정리한 이 책은 생물학에 대한 당대 지식의 최전선을 깊이 다룬 과학책이자, 저자의 철학적 입장도 곳곳에 드러나 있는 훌륭한 과학철학책이기도 하다. 철학을 전공한 역자의 번역도 정말 좋다. 저자의 미묘한 철학적 입장을 독자가 오독하지 않도록 공들여 옮긴 멋진 책이다.

이 책의 배경을 이루는 중요한 사건이 바로 당시 서유럽을 중심으로 일어났던 68운동이다. 권위적 정치체제에 대한 반감, 정당화하기 어려운 베트남전쟁에 대한 반대, 그리고 이런 문제를 일으킨 제국의 모습을 띤 자본주의에 대한 근본적 성찰이 서구 지성계를 휩쓸던 시대다. 당시 서구의 많은 지식인이 사회주의를 대안으로 심각하게 고민했다는 것도 염두에 두면서 책을 읽을 것을 권한다. 이 책에 담긴 저자의 철학에 큰 영향을 미친 이가 알베르 카뮈다. 자크 모노와 알베르 카뮈는 2차 대전 당시 프랑스 레지스탕스 운동에 함께 참여했다는 공통점도 있다.

책의 앞부분에서 자크 모노는 알베르 카뮈의 <시시포스의 신화>를 언급한다. 영원히 무거운 바위를 산꼭대기로 반복해서 밀어 올려야 하는 시시포스의 모습에서 저자는 과학적 세계관을 갖게 된 인간을 떠올린다. 시시포스가 끊임없이 바위를 밀어 올리는 행위는 신들을 부정하는 적극적 투쟁이라고 말하는 저자는 우리에게 행복한 시시포스를 상상하라고 당부한다. 슬퍼서 오히려 당찬 시시포스의 모습에서 나는 영화 <매트릭스>에서 빨간약을 삼키고 황량한 진실의 사막에서 눈 뜬 네오를 떠올렸다. <매트릭스>의 진실의 사막은 철학자 파스칼의 ‘거대한 침묵’으로 나를 이끈다. 파스칼은 “의식과 목적을 빼앗긴 자연은 이제 인간이 무엇을 위해 살든, 아무런 상관도 하지 않는다. 인간은 삶의 의미에 대해 우주로부터 아무런 말도 듣지 못한다. 인간은 자신의 삶에 절대적으로 무심한 우주의 거대한 침묵 속에 둘러싸인 고독한 자신을 발견한다”고 했다. 자크 모노는 <우연과 필연>에서 의미 없는 우주에서 발견한 인간의 의미를 담담하게 들려준다. 바위를 밀어 올리는 투쟁으로 신에게 저항하는 시시포스도, 진실의 사막에서 눈 뜬 네오도, 그리고 과학적 세계관을 갖춘 우리 인간 모두는 우주의 거대한 침묵 속에서도 행복할 수 있다. 아니, 이 광막한 의미 없는 우주에서 우리가 아는 유일한 지적 존재인 인간은 황량한 진실의 사막에서 행복할 의무가 있다고 나는 믿는다.

<우연과 필연>을 이해하기 위해 꼭 알아야 할 또 다른 철학적 개념이 바로 ‘목적론(teleology)’과 ‘합목적성(teleonomy)’이다. 온갖 자연현상이 각각의 뚜렷한 의도와 목적이 있어서 일어난다는 주장이 목적론이다. 나무는 여름철 땀 흘린 우리에게 그늘을 드리우기 위해 가지를 펼치고, 비는 온갖 식물이 잘 자라도록 땅을 적신다. 어려서 우리가 왜 비는 내리고 나무는 그늘을 드리우는지 물으면 부모님이 들려주었던 이런 방식의 직관적인 설명이 바로 목적론적 세계관의 반영이다. 목적론이 목적을 의도한 주체의 존재를 명시적으로 또는 암묵적으로 상정한다면 합목적성은 원인이 아닌 결과로서의 의도의 구현을 말한다. 저자가 생명은 의도로 만들어진 존재가 아니라 의도가 깃든 존재라고 말하는 이유다. 주체없는 의도가 원인이 아닌 결과로서 드러난다는 주장이 합목적성이다. 생명은 목적론적인 존재가 아니라 합목적적인 존재다.

생명에 대한 목적론적인 이해와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이 생기론(vitalism)이다. 생명의 신비에 놀란 근대의 과학자들은 생명은 물질로 이루어진 것들과 근본적으로 다른 무언가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다. 철학자 베르그송이 약동하는 생명은 비생명과 근복적으로 다르며 인간의 합리적 지성은 비생명에만 적용이 가능해서 생명에 대한 분석적/자성적 논의는 무의미하다고 주장하는 것도 생기론을 닮은 철학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저자는 생기론의 근거는 현재의 무지일 뿐이며 분자 생물학의 발전으로 생기론이 결국 수명을 다할 것이라는 전망을 <우연과 필연>에서 피력한다. 20세기 생명과학의 눈부신 발전으로 생기론이 자취를 감춘 현재의 상황을 보면 자크 모노의 예상이 맞았던 셈이다. 생명의 신비함으로 떠올린 것이 생기론이라면 생기론을 비생명을 포함한 모든 것으로 확장한 것이 물활론(animism)이다. 생명만 신비롭다는 생각이 생기론이라면 이 세상 모든 것이 신비롭다고 생각하는 것이 물활론인 셈이다. 우리 선조는 사람과 동물에서 의도를 보고 이를 모든 대상에 확대 적용해 물활론적 믿음을 만들어냈다.

물활론으로 보는 세상은 정말 아름답다. 눈앞의 사람, 반려견, 그리고 나무와 바위와 눈 내리는 겨울 산의 풍경 등, 이 세상 모든 것에는 어떤 신비로운 의도가 구현되어 있다는 물활론은 우리 마음에 세상과의 심원한 결속의 느낌을 불러 일으킨다. 자크 모노는 이러한 하나 됨의 느낌을 ‘옛날의 결속(ancient alliance)’이라고 부른다. 대문자로 쓴 Ancient Alliance는 기독교 성경의 구약으로도 읽힐 수 있다는 것도 흥미롭다. 구약 성경도 자연과 인간이 하나임을 이야기하는 물활론적 투영이라고 저자가 주장하는 셈이다. 철학자 헤겔이 사유의 자발적 운동 방식으로 파악한 변증법의 철학을 물질로 이루어진 세상에 과도하게 일반화해 적용한 것이 마르크스와 앵겔스의 변증법적 유물론임을 간파한 저자는 이들의 유물론 또한 물활론의 다른 방식의 투영일 뿐이라고 비판한다. 인간을 기준으로 만들어낸 사고의 방식을 세상 전체로 일반화하는 이러한 모든 오류의 근원에는 인간중심주의가 도사리고 있다고 말한다. 진화론으로 마침내 신은 죽을 수 있었지만, 그 자리에 우리는 자꾸 또 다른 환상을 상정한다고 말하는 저자의 글솜씨가 멋지다.

/궁리

자크 모노는 책의 1장에서 자연물과 인공물을 구분하는 알고리즘에 대한 흥미로운 사고실험을 펼친다. 첫 번째 버전의 알고리즘은 거시적 규모의 구조에서 드러나는 규칙성과 반복성을 인공물이 만족해야 하는 조건으로 설정한다. 하늘에서 본 아파트 단지와 나무 울창한 숲을 각각 인공과 자연으로 옳게 판별할 수 있지만, 석영 결정을 인공물로 판단하는 오류가 발생한다. 두 번째 버전에서는 석영의 문제를 해결하고자 단순한 미시적 규칙으로 발생하는 거시적 구조의 규칙성의 경우는 자연물로 판단한다는 조건을 덧붙인다. 하지만 이것도 문제다. 석영 결정은 자연물로 제대로 판별하지만 규칙적인 벌집 구조를 인공물로 판단하는 오류가 생기기 때문이다. 첫 번째와 두 번째 버전의 알고리즘에 관련된 사고실험을 통해서 외부에 드러나는 형태나 구조만을 판별 기준으로 이용하는 알고리즘은 실패한다는 결론에 도달한 저자는 구조가 아닌 기능으로 눈을 돌리게 된다. 이어지는 세 번째 버전의 알고리즘은 인공물에는 발명자가 기대하는 기능이 있다는 것에 주목한다. 이마저도 쉽지 않은 일이다. 결과로 드러나는 기능에는 최초 발명자의 존재가 숨겨져 있기 때문이다. 눈과 카메라는 기능의 면에서는 어떤 의도가 반영된 것으로 보여서 둘 다 합목적성을 보여주지만, 카메라와 달리 눈에는 의도의 입안자가 없다. 그래도 저자의 세 번째 버전의 알고리즘은 무척 유용해서 합목적성을 충분조건이 아닌 생명의 필요조건으로 상정할 수 있게 해준다. 모든 생명은 합목적적 존재지만 합목적성을 보여준다고 생명인 것은 아니라는 뜻이다. 합목적성은 생명이라면 꼭 가져야 할 속성 중 하나다. 세 번째 버전에 대한 사고실험을 거치면서 저자는 생명이 가져야 할 또 다른 속성을 찾아낸다. 인공물의 구조가 구성 질료에 대한 외부 힘의 적용으로 만들어지는 데 반해서 생명체의 구조는 내적인 형태 발생적 상호작용에 의한 것이라는 깨달음이다. 합목적성에 이어 저자가 찾아낸 생명의 두 번째 속성이 바로 자율적 형태 발생이다. 이어서 저자는 생명의 경우 자신의 구조를 발생시키는 정보를 불변적으로 복제해 내고 전달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복제의 불변성을 생명의 세 번째 속성으로 제안한다.

저자가 찾아낸 생명의 세 속성인 합목적성, 자율적 형태 발생, 그리고 복제의 불변성은 흥미로운 두 역설로 우리를 이끈다. 불변성의 역설은 고도의 질서를 갖춘 구조가 어떻게 유지되고 복제될 수 있는지, 불변성에도 불구하고 생명의 진화가 보여주는 엄청난 다양성이 어떻게 가능한지를 묻는다. 저자는 불변성이 열역학 제2 법칙인 엔트로피 증가의 법칙을 위반하지 않아서 복제도 진화도 얼마든지 가능하다는 답을 들려준다. 생명의 불변적 복제와 진화의 과정에서 생명계 외부의 엔트로피가 증가하기 때문이다. 저자의 두 번째 역설이 바로 합목적성과 객관성 사이의 역설이다. 과학이 기반하고 있는 공리를 딱 하나 꼽으라면 저자를 포함한 모든 과학자가 꼽을 것이 바로 자연의 객관성이다. 이 공리 자체를 증명하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모든 과학은 자연의 객관성이라는 공리 위에 근거를 두고 있다고 많은 과학자가 동의할 것이 분명하다. 이러한 객관성의 공리에 따르면 과학에서 현상을 설명하기 위해 의도를 끌어들이는 것은 명확히 거부된다. 그렇다면 저자가 생명의 가장 중요한 속성으로 찾아낸 합목적성이 자연의 객관성 공리와 모순되는 것처럼 보인다는 것이 저자의 두 번째 역설이다. 저자는 바로 이 모순이 생물학의 중심 문제라고 강조한다. 이 문제에 대한 저자의 답변이 바로 책의 제목 <우연과 필연>에 담겨있다. 객관적인 우연성이 결과로서의 합목적성을 결국 만들어낸다는 관점이다. 저자는 5장에서 “우연은 불변성의 기구에 의해 포획되고 보존되어 질서로, 규칙으로, 필연으로 전환된다. …우연의 보존이 생명체 진화가 보여주는 창조적인 자유를 가능케 한다”라고 말한다. 생명의 합목적적 필연성은 자연의 객관성의 공리를 전혀 위배하지 않는 우연성에서 비롯한다.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우연과 필연의 열매다. 우연과 필연이 모순이 아니듯, 객관성과 합목적성이 모순되는 것은 아니라고 저자는 말한다.

생명권의 진화는 제1원리로부터 연역될 수 없으며 미래에 대한 예측은 결정론적이 아니라 통계적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저자의 제1원리를 물리학의 기본 법칙으로 생각할 수 있다. 물리학의 기본 법칙은 은하와 행성의 출현을 예측할 수는 있어도,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라는 구체적이고 개별적인 행성의 존재를 물리학의 기본 법칙으로부터 연역할 수는 없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행성 지구의 존재가 제 1원리를 위반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 중요하다. 나도 같은 생각이다. 모든 생명현상을 물리학으로 설명할 수 있다는 주장은 어불성설이지만 물리학을 위배하는 생명현상은 불가능하다고 믿는다. 저자는 “내 손안의 자갈은 반드시 존재해야 할 필연적인 의무를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존재할 수도 있는 권리는 가지고 있다”라는 문장으로 자신의 주장을 맛깔나게 표현한다.

저자는 책에서 ‘자연의 객관성 공리’에 기반한 과학적 세계관인 ‘지식의 윤리’를 제안한다. 우리가 살면서 하는 판단은 사실에 대한 판단과 가치에 대한 판단으로 나눌 수 있다. 저자의 용어 ‘지식의 윤리’에 등장하는 지식이 사실에 대한 것이라면 윤리는 본질적으로 가치와 당위에 대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저자가 말하는 ‘지식의 윤리’는 가치 판단으로서의 윤리가 사실 판단으로서의 과학적 지식에 기반해야 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내 생각도 같다. 사실 판단의 측면에서 옳은 것만이 올바른 가치 판단의 근거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 옳은 것만이 옳은 것의 바탕이 되어야 한다는 내 평소의 신념을 저자는 ‘지식의 윤리’라는 개념으로 표현했다고 생각했다. 오직 객관적인 지식만을 진리의 유일한 원천으로 보고자 하는 저자의 ‘지식의 윤리’ 세계관은 인간과 자연 사이의 안온한 물활론적 결속을 비판한다. 저자의 새로운 사상을 받아들인 인간은 피할 수 없는 우주의 무의미에 맞닥뜨려 도대체 해소할 수 없는 불안을 갖게 되는데 저자는 이를 ‘영혼의 질환’이라고 부른다. 바로, 시시포스와 네로, 그리고 과학적 세계관으로 무장한 우리 모두가 갖게 되는 해소할 수 없는 불안감이다. <매트릭스>의 빨간약처럼 일단 삼키고 나면 도대체 벗어날 수 없는 영혼의 질환에 질끈 눈 감고 편안하고 안온한 오래전의 물활론적 결속으로 회귀할 수는 없다. 바위를 영원히 밀어 올리면서 시시포스는 행복할 수 있다. 나도 그렇다.

책 마지막 부분 문장을 아래에 옮기며 글을 마친다.

“옛날의 결속은 깨어졌다. 인간은 마침내 그가 우주의 광대한 무관심 속에 홀로 내버려져 있음을, 그가 이 우주 속에서 순전히 우연에 의해서 생겨나게 되었음을 알게 되었다. 이 우주의 그 어디에도 그의 운명이나 의무는 쓰여 있지 않다. 왕국을 선택하느냐 아니면 어둠의 나락으로 떨어지는 것을 선택하느냐 하는 것은 전적으로 인간 자신에게 달려 있다.”

여러분의 선택이 궁금하다.

*책을 읽고 함께 이야기 나눌 주제:

1. 제목 <우연과 필연>의 의미를 책의 내용을 가지고 다양하게 설명해보세요.

2. 의도가 깃들어 있는 생명이 의도를 인식하지 못할 수 있습니다. 인식되지 않은 의도도 의도일까요?

3. 생명의 세 가지 속성으로 합목적성, 자율적 형태 발생, 복제의 불변성을 저자는 제시합니다. 각 속성을 비생명과 비교해 보세요.

4. 합목적성의 미시적 근원으로 저자는 효소 단백질 구조의 입체 특이성을 지목합니다. 효소 단백질과 맥스웰의 도깨비를 비교해 보세요.

5. “구조의 후성적 형성은 창조가 아니라 드러남이다”의 의미를 우연과 필연의 입장에서 설명해 보세요.

6. 복제적 불변성과 생명 다양성 사이의 역설의 의미는 무엇인가요? 이 역설을 어떻게 저자가 설명하나요?

7. 한 유전자의 돌연변이는 드물어도 개체군 전체에서 돌연변이는 수없이 발생합니다. 그런데도 종이 안정성을 유지할 수 있는 이유는 무얼까요?

8. 저자가 얘기한 영혼의 질환은 피할 수 있는 것인가요? 한번 걸리면 나을 수는 있을까요? 시시포스는 멈춰야 할까요?

9. 객관성의 공리에 기반한 지식의 윤리를 휴머니즘으로 규정하는 저자의 주장은 혹시 다시 또 옛날의 결속을 복구시키는 것은 아닐까요?

10. 책의 마지막 문장에서 저자는 왕국과 어둠의 나락 사이의 선택을 묻습니다. 왕국과 어둠의 나락은 무엇일까요? 그리고 여러분의 선택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