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점 고립주의 속으로 빠져들어 가는 트럼프의 미국 [김경훈의 시네노믹스]

영화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

2026-01-05     김경훈 칼럼니스트
영화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의 한 장면. /사진=워너브러더스코리아

영화시장이 넷플릭스에 노출되고 5~6년이 지났다. 현장의 환경은 그대로 변한 게 없다고 착각할지 몰라도 제작의 앞과 뒤에서 투입되고 사출되는 펀딩과 배급(알고리즘의 배치)에서는 이미 할리우드 방식이 침투하고 있거나 장악하고 있을 거라고 보인다.

얄팍한 편견, 폭력적으로 작동하는 상식, 그 유명한 붕당식 파벌에 따라 기민하게 움직이는 공론이라는 가면을 쓴, 여론 조작이 가능한 조그만 시장에서 벗어나고 싶어 하는 마음들이 넷플릭스 순위표라는 보드에서 위안과 정당성이라는 쾌감을 느끼며 넷플릭스 속으로 탈주하는데 줄을 섰지만 이제 그 시효가 된 것이다.

표준화된 매뉴얼에 지배당하는 이유는 그렇게 모험적이지 않게 독립적이지 않게 하지만, 반드시 관철해야 하는 자본의 요구수익률이 기회비용을 무한대로 만들기 때문이다. 창작 의욕을 갉아먹는 수익률의 패퇴로 기억되는 2025년이 막을 내렸지만, 그럼에도 할리우드는 마르지 않는 샘으로 남아 있을 거라는,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가 얼마나 영리한 배우인지 여실히 보여주는 영화가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이다.

OTT시장 역시 할리우드의 하부구조에 불과해 보인다는 것을 입증하고 있는데, 세계 각국의 배우나 감독들을 수혈해 새로운 영화 문법을 할리우드 시스템 내에 이식하는 것은 사실 미국의 이민사, 역사 그 자체라고 할 수 있다.

미국이 지난 20세기 가장 성공한 국가전략의 하나라고 늘 자랑하는 이민정책은 나사(NASA)나 실리콘밸리에서 보듯이 해외 인재들의 스카우트와 J1비자로 구체화할 수 있다. “이민자의 역설”에서 눈치챌 수 있지만, 노동시장의 신진대사와 산업구조의 재편이라는 정책 목표에 의해 불가피한 것이었다고 할지라도 산업현장과 공동체 사회에서 이민자에 대한 배타적 거부감은 생래적이다.

19세기 유럽 제국주의는 침투와 삼키기 중 식민지 국가에 대한 침투를 제국의 힘을 투사하는 주된 목표로 삼았다. 이에 비해 20세기 미국 제국주의는 합중국 주의를 극대화하는 방책으로 이민자에 대한 포섭, 삼키기(다른 말로 고립주의)를 주된 전략목표로 견지했다.

사실 옛 제국주의 국가들에서 벌어지는 이민자 혐오는 지중해 연안이나 카리브해 연안 등의 공간적 과잉에서 비롯된 것이라 그들이 벗어던지기 어려운 일종의 업보이지만, 미국의 경우에는 제국주의 국가의 지정학적 숙명 외에 1·2차 세계대전으로 유동화되어 구대륙으로부터 탈출한 자까지 포섭하는 것이어서 계몽주의의 모순이 일견 해결되는 것처럼 착각하게 만드는 측면도 있다.

하지만 미국의 패권이 100년을 지나자 여지없이 그 삼키기, 고립주의의 모순 또한 첨예해지면서 상징적인 완곡화(예를 들면, 아메리칸 드림)로는 해결할 수 없는 상태에 이르렀음을 드러내는 것이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이다.

여기에서는 20세기 이데올로기적 대립과 모순 관계가 흔적이기보다는 찌꺼기처럼 남아 있지만, 인종차별·종교갈등·성담론·이민자 역설 등이 테러리즘이라는 회오리 속에 또 하나의 진공상태를 만들어 놓기도 한다.

영화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의 한 장면. /사진=워너브러더스코리아

이 영화에서 가장 흥미로운 인물은 ‘퍼피디아’이지만, 숀 펜이 연기한 ‘록조’는 할리우드에서 백인우월주의에 사로잡혀 손쉽게 살려고 하는 백인 남성을 그리는 전형처럼 보인다. <어프렌티스>에서 트럼프의 사부로 나오는 로이 콘이 그러하듯이, 성적인 호기심이나 매혹을 숨기려고 전전긍긍하면서 과장된 제스처가 몰고 오는 초라한 몰락이 그렇다.

슬럼이나 게토에서 태어나 자라고 살아가는 흑인들은 마치 제주도에서 살고 있는 섬 주민들과 어떤 면에서 비슷해 보인다. 뭍에서 오는 사람들에게 끊임없이 수탈당하지만, 탈출구가 막힌 폐쇄된 공간 때문에 쉽게 저항하기도 어렵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제주도에는 ‘등명대’라는 것이 있다. 섬에 옛사람들이 설치해 놓은 등대이다. 뱃길을 안내하고 암초를 피하게 하고 뱃사람들을 위한 것이라고 하지만 동시에 뭍에서 오는 숱한 재앙들을 불러들이기도 한다.

슬럼의 퍼피디아에게 그런 등명대 역할을 하는 것은 ‘Sex & Revolution’이지만, 현실 사회주의 국가 소련이 이미 사라져 버렸기 때문에 혁명이라는 거대한 상징은 공허하거나 심지어 진부해 보이기까지 한다. 이후 멕시코로 건너간 그녀가 삶의 무게를 어떻게 회피했는지 알 수 없지만 중요하지도 않다. 그녀의 회의는 한겨울에 피어 봄이 오기 전에 바닥을 빨갛게 물들이는 동백처럼 추락으로 치유되기 때문이다.

윌라가 퍼피디아로부터 편지를 받았기 때문에 혁명가 혹은 사회 운동가의 면모를 드러냈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녀의 어머니·할머니가 미국 사회에서 흑인으로 살아가면서 형성되어 있던 저항 의식이 이미 배어있고 잠재되어 있다고 보아야 한다. 또한 인종차별주의와 반이민자 정서가 결합해 폭풍처럼 미국 사회를 휩쓸고 있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각성하는 측면도 있었다.

그만큼 미국 내 주류사회와 소수 민족 등과의 역학관계는 마치 북반구와 남반구의 관계처럼 서서히 명백하게 변하고 있었다. 그것이 주는 압박감이 ‘KKK’를 부활시키고 트럼프에게 막강한 힘을 실어주고 있지만 어쩌랴, 세상 만물은 무상(無常)하고 늘 변화한다.

따라서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가 연기한 ‘밥’의 모습이 현재 미국 중산층의 실상이라고 보인다. 밥은 한때 퍼피디아를 도와 로켓을 쏘아 올리고 폭탄을 터뜨렸지만, 지금은 윌라를 보살피기도 버거워 보인다. 서부 개척 시대나 2차대전 독일이나 일본과 싸우던 때, 테러와의 전쟁 시절은 다시 올까? 그렇지 않을 것이다.

미국은 이제 고립주의의 심연에서 아메리카의 문제 즉, 중남미로부터의 불법 이민과 마약 문제 등에 집중하려고 하겠지만, 그 사이에 유라시아 대륙은 얼마만큼 혼란스러워질지, 미국이 이민자 경제(생산과 소비 등에 얽힌)와 결별할 수 있는지 의문은 사라지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