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팡’이라는 막장으로 달려가는 AI 시대의 노동자들 [김경훈의 시네노믹스]
자본-언론-사법 카르텔 속 블랙머니의 레버리지… 45년 전 탄광촌의 비극은 피하길 바랄 뿐
오래전 누군가 삶의 비탈에 서 있는 자에게 “막장에 가면 된다”라고 말하였지만, 갱도 끝까지 탄차를 타고 길에 그는 이미 선승(禪僧)의 집중력으로 채탄할 준비가 되어 있다.
생활의 중력을 깨뜨리며 자유로워지는 집념의 탈각은 어느 곳에서든지 언제든지 발휘될 수 있다. 따라서 우리 사회가 수십년간 목도한 실재계의 위력은 오직 경험을 통해서만 보전된다.
그러니 우리 시민사회가 지닌 막강한 힘을 가벼이 여기는 자들은 혹은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자들은 이른바, 자본-언론-사법 카르텔에 복무하며 돈을 매개로 상징계를 굴릴 뿐, 돈이라는 실재조차 생산의 원천인 노동과 동떨어진 블랙머니의 수수료 정도로만 인식한다.
반대급부의 대가관계가 측량 불가인 이유는 블랙머니의 레버리지가 백성들의 고단한 삶 자체로써 오직 사후적으로 측정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 번도 예외 없이 분기가 응력을 축적하면 쉽게 판을 뒤집었다. 유대인 자본은 이를 뼈저리게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엡스타인 파일처럼 건방지게 함부로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다.
머니 마켓의 하수구를 흐르는 탐욕은 동원 탄좌 사북 광업소를 흐르는 지장천보다 더 검다. 새까맣던 지장천의 물 색깔이 어느덧 맑아져 지장수 막걸리의 탄산처럼 청량하지만, 이를 악물고 살아왔다는 어느 노동자의 증언처럼 저 어둡고 깊은 갱도에서 들이마시는 석탄 가루와 먼지는 끝내 땀 흘린 노동의 대가로 돌아오지 않았다.
자본과 노동의 모순관계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탄광 노동자와 자본-언론-사법 카르텔의 브로커가 각각 우리 사회의 생산에 기여하는 한계생산성이 과연 그렇게 차이가 나는 것인가? 모두들 지금도 끊임없이 되묻고 있다. 비참한 근로환경보다 그들의 심장을 거세게 박동시키는 것은 그 오랫동안 축적된 받아들일 수 없는 차이 즉, 차별에서 비롯된다.
경제 생태계를 교란하고 의사결정을 왜곡하던 한국의 관료주의는 이미 수차례에 걸친 정권교체를 거치면서 시민사회의 감시와 견제 속에 신뢰도를 높였지만, 그러는 사이에 그 균형감을 힘의 공백으로 곡해한 자본-언론-사법 카르텔은 희생양과 정화라는 메커니즘 속에 점점 더 뻔뻔해졌다.
희생양은 언제나 넘쳐나고 정화라는 기제 속에 두드러진 폭력적 선택 과정이 수차례 반복되면서 한국의 민주주의는 야성을 잃어버리고 길이 들여짐으로써 그 위기가 본격화하기 시작했다고 볼 수 있다. 국가 폭력이 이른바 형식적·절차적 민주주의 뒤에 숨어있다고 하더라도 이에 상응하는 시민사회 혹은 부르주아지의 힘이 이른바 법도를 유지할 만큼의 상징 권력을, 혹은 경제 자본을 축적하지 못하고 여전히 객체로 머무는 한, 계엄군은 그 총부리를 다시 시민들을 향해 겨누게 될 것이다.
이런 시점에 <1980 사북>의 사택촌에서 밤마다 벌어지는 연행과 암행 독찰대의 횡포는 이것이 아스라이 멀어져간 20세기 군사정권의 전유물이 아니라는 것을 충분히 상기시킨다. 언제든지 다시 출몰하여 시민들을 순한 양처럼 숨죽이게 할 수 있는 것이다.
일종의 정치적 지체라고 할 수 있는 민간인 사찰 등은 왕정에서 문화적·관념적으로 벗어나지 못한 동아시아의 구태라고 볼 수 있다. 위임 권력이라는 대의 민주주의의 요체가 아직은 설익고 그래서 권력이 여전히 총칼이나 기소권·수사권에서 나온다고 믿고 권력투쟁 혹은 권력의지에 전념하는 미숙한 신념들이 주술과 합쳐져 집단광기로 범람하는 것이다.
이에 대응하는 것이 익명성에 기대어 겨우 투서나 하는 블라인드 같은 것이라면, 우리의 민주주의는 점점 더 비루해진 것이다. 이러한 몸짓은 공포탄 한 방이면 신기루같이 사라질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노쇠해진 시민사회는 후일담이나 나누는 사랑방의 아랫목에서 일어나 모든 권위를 40대에게 과감히 넘겨야 할 것이다. 이젠 그들이 경험하게 해야 하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성리학과 화엄 사상이 서해를 건너 마침내 조선에서 견고하고 정교한 성리학적 지배 질서를 구현했듯이, 북·중·러·일 주변 국가들의 정치적 미숙함을 뿌리치고 국민주권과 대의제를 기반으로 구성하는 민주공화정을 향해 서구 민주주의가 아닌 한국 민주주의로 한 걸음 더 나아갈 수 있다.
수많은 가족의 삶의 터전이었던 사북 등의 탄광지역은 석탄산업 합리화 정책에 따라 대부분 폐광하고 1995년 또 한 번의 합의에 의해 그 자리엔 카지노가 들어섰다. 어느 해인가 심야 버스를 타고 태백에 간 적이 있었다. 새벽 2시쯤인가 고한사북 버스터미널에 도착했을 때 대부분의 승객이 버스에서 내려 칠흑 같은 어둠 속에 반짝거리는 전당포 불빛을 향해 사라지는 모습은 그야말로 세상의 끝에 들어서는 모습이었다.
인터넷과 AI의 도움으로 물류 혁신이 가속화하면서, 오토바이 배달원들이 수많은 교차로에서 아슬아슬 곡예 운전하거나, 물류창고마다 일용근로자들이 상하차나 포장 작업에 진땀을 흘리는 모습은 그들이야말로 새로운 산업역군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하지만 즉각적이고 신속한 대체 가능성을 가진 일자리임도 알게 된다.
하지만, 30년 정도 유지됐던 석탄산업보다 AI 시대 물류산업에 투입된 노동자들에 대한 수요는 더 오래 지속될 것이란 것도 짐작할 수 있다. 따라서 우리는 2가지 문제에 대해 숙고해야 한다.
첫 번째는 당연히 임금수준이고 이는 쿠팡과 알리바바·테무 등의 경쟁 관계 속에 정립될 것이다. 두 번째는 그들의 신체의 자유에 관한 문제이다. 그들은 핵심 산업의 역군으로서 노동과정 속에 신체를 건강하게 유지할 권리가 있기 때문이다. 45년 전 탄광촌 광부와 비슷하게 함부로 사람을 바꿔 쓸 수 있다는 생각에서 비롯된 비극을 피하길 바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