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턴은 어떻게 만유인력을 알아냈을까 [김범준의 세상물정]
역사상 가장 위대한 물리학자가 누구냐고 묻는다면 나를 포함한 많은 과학자가 가장 먼저 떠올릴 사람이 아이작 뉴턴이다. 게일 E. 크리스천슨의 책 <뉴턴: 어떻게 만유인력을 알아냈을까?>는 그리 길지 않은 분량으로 뉴턴의 일생과 그의 과학적 업적, 그리고 당대 과학계의 분위기를 생생하게 알려주는 좋은 책이다. 저자가 보여주는 뉴턴의 모습은 모순적이다. 근대 이성을 대표하는 사람으로서 미적분학을 창시하고 보편 중력 법칙을 찾아냈지만, 동시에 뉴턴은 연금술과 성경 연구에 매진한 어쩔 수 없는 중세 유럽인이었다.
갈릴레오가 사망한 1642년 뉴턴이 태어났다. 갈릴레오는 고대 그리스부터 오래 이어지던 아리스토텔레스의 물리학에 커다란 균열을 만든 사람이다. 만약 공기가 없다면 모든 물체는 질량과 무관하게 같은 속도로 낙하한다는 것을 밝혔고, 외부의 힘이 없다면 물체는 영원히 직선을 따라 움직인다는 관성의 원리를 찾아냈으며, 자신이 만든 망원경으로 목성의 위성을 발견하는 등 놀라운 발자취를 남겼다. 갈릴레오가 시작한 고전역학은 그의 바통을 물려받은 뉴턴에 의해 결국 완성된다. 뉴턴이 남긴 유명한 말, “내가 더 멀리 볼 수 있었던 것은 거인의 어깨 위에 서 있었기 때문이다.”에 등장하는 거인이 한 명이라면 갈릴레오가 딱 제격이다.
영국 시골 링컨셔의 울즈소프 장원의 부유한 농부였던 뉴턴의 생부는 유언장에 X라고 서명한 문맹이었다. 아버지가 사망할 당시 이미 임신 중이던 뉴턴의 어머니 한나는 “찻주전자에 들어갈 정도로 작은” 미숙아 뉴턴을 낳았다. 재혼한 어머니가 계부와 다른 곳에서 살게 되면서 뉴턴은 울즈소프에서 외로운 어린 시절을 외할머니와 보낸다. 뉴턴이 어려서 다닌 인근 지역 그랜섬의 킹스 스쿨에는 당시에 뉴턴이 칼로 “I Newton”이라고 새긴 낙서가 지금도 전해지고 있다. 어린 뉴턴은 직접 해시계를 만들어 정확한 시간을 알아냈고 떨어지는 물방울로 작동하는 물시계를 제작하기도 했다. 이론적 작업 못지않게 실험에도 능숙했던 성년기 뉴턴의 모습을 미리 볼 수 있는 장면이다. 어머니 한나는 킹스 스쿨을 졸업한 뉴턴이 농사일에 매진하기를 바랐지만, 뉴턴은 아무런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 이때 뉴턴의 미래에 큰 영향을 준 이가 바로 킹스 스쿨의 스토크스 교장이다. 뉴턴의 놀라운 학문적 재능을 알아본 교장은 자비로 40실링을 주면서 뉴턴을 대학에 보내달라고 한나에게 간청하고 결국 뉴턴은 1661년 케임브리지 대학교 트리니티 칼리지에 진학한다.
케임브리지에서의 학창 시절 뉴턴은 자신의 생각을 노트에 정리하기 시작했다. 뉴턴 연구자들이 <생각의 샘>이라고 부르는 노트다. 뉴턴은 1663년 노트에 “플라톤은 나의 친구다. 아리스토텔레스도 나의 친구다. 그러나 진리야말로 누구보다도 더 소중한 나의 친구다”라고 적었다. 위대한 과거의 철학자를 존경했지만, 이들의 학문에 얽매이지 않고 오직 진리만을 추구하겠다고 다짐했다. 유클리드 기하학과 데카르트의 해석 기하학을 독학으로 정복한 뉴턴은 대학 졸업시험을 무사히 통과하고, 당시 널리 확산 중이던 흑사병을 피해 고향 집에 머물게 된다. ‘기적의 해(annus mirabilis)’로 불리는 1666년을 포함한 짧은 기간, 뉴턴은 다섯 편의 논문을 쓴다. 스스로 유율법(method of fluxions)이라고 부른 미적분학을 만들어 냈고, 빛의 성질을 연구했으며, 보편 중력 법칙을 발견한 것도 이때다. 울즈소프에서 머물던 이즈음, 떨어지는 사과를 보면서 중력을 떠올렸다는 얘기는 노년의 뉴턴이 직접 들려준 말이라고 한다. 그러나 떨어지는 사과를 보면서 지구가 잡아당기는 힘이 있어야 한다는 정도의 생각은 누구라도 어렵지 않게 떠올릴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떨어지는 사과를 보면서 뉴턴은 그 너머 달도 함께 바라보았음에 분명하다고 나는 생각한다. 관성은 달을 직진하도록 하고 지구의 중력은 달을 잡아당긴다. 이 두 운동의 결합으로 달이 원운동을 한다는 것을 뉴턴은 깨달았다. 사과나 달이나 똑같은 중력 법칙을 따른다는 것을 울즈소프에 머물던 시절 처음 발견했다는 것이 뉴턴의 사과 일화에 관련된 더 정확한 진실이라고 할 수 있다. 이즈음 뉴턴은 어두운 방에 낸 작은 구멍으로 들어온 햇빛을 프리즘에 통과시키는 실험도 했다. 프리즘을 통과한 빛이 여러 빛깔의 띠로 나뉜다는 것은 이미 알려져 있었지만, 당대의 많은 사람은 순수한 흰빛이 프리즘을 통과하면서 순수함을 잃어서 색을 갖게 된다고 주장했다. 뉴턴은 프리즘을 통과해 띠로 나뉜 빛 중 딱 한 색의 빛살을 골라 두 번째 프리즘에 통과시키면 더 이상 여러 색으로 나뉘지 않으며, 첫 프리즘을 통과해 여러 띠로 나뉜 전체 빛을 뒤집힌 두 번째 프리즘에 통과시키면 다시 원래의 흰빛으로 모인다는 것을 발견했다. 흰빛은 가장 순수한 빛이 아니라 여러 색의 빛이 모여 이뤄진 것이라는 것을 명확히 보인 결정적 실험이다.
여러 경이로운 연구 성과를 거둔 뉴턴은 이듬해인 1667년 케임브리지 대학교의 석사과정에 입학한다. 1669년 뉴턴의 천재성을 인정한 배로 교수의 추천으로 27세의 젊은 나이에 케임브리지 대학교의 수학교수로 취임한다. 당시에 그려진 젊은 시절 초상화에서 볼 수 있듯이 뉴턴은 이미 이때쯤에는 끊임없는 학문적 사색 때문인지 은발의 머리카락을 갖게 되었다. 뉴턴은 1669년 스스로 반사 망원경도 제작했다. 렌즈를 이용한 갈릴레오의 굴절식 망원경은 위에서 설명한 빛의 파장에 따른 굴절률의 차이로 발생하는 색수차로 정확한 초점을 맺기 어렵다. 굴절이 아닌 반사를 이용해 이 문제를 해결한 것이 바로 뉴턴의 반사 망원경이다. 뉴턴 망원경의 몸통 아래에는 마치 지구본처럼 생긴 둥근 공이 연결되어 있다. 내가 가진 작은 모형 뉴턴식 망원경에서도 쉽게 확인할 수 있듯이 원하는 어느 방향으로라도 망원경을 향하게 할 수 흥미로운 방식이다. 당시 영국의 국왕 찰스 2세에게 자신이 만든 망원경을 보여준 뉴턴은 곧 영국 왕립학회 회원이 된다.
근대 유럽에는 프린키피아(Principia)라는 짧은 제목으로 불리는 두 권의 책이 있다. 1647년 출판된 데카르트의 <철학의 원리(Pincipia Philosophiae)>와 1667년 뉴턴이 고전 물리학의 출범을 알린 <자연철학의 수학적 원리(Philosophiae Naturalis Prinicipia Mathatica)>다. 뉴턴의 <프린키피아>의 표지를 보면 제목의 네 라틴어 단어 중 Philosophiae와 Principia가 더 큰 활자로 인쇄되어 있어 언뜻 보면 데카르트의 책과 같은 제목이 뒤집힌 순서 Philosophiae Prinicipia로 적혀있는 것처럼 보인다. 데카르트의 <철학의 원리>를 계승하면서도 다르게 발전시켰다는 것을 보이고자 한 뉴턴의 의도가 표지에 담겼다고 상상해 본다.
1689년 뉴턴은 당시 케임브리지 대학교의 대표가 의원으로 선임되는 관례를 따라 영국 의회의 의원이 된다. 뉴턴은 의회에서 단 한 번도 공식적인 발언을 하지 않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딱 한 번 입을 연 것이 추우니 창문을 닫아달라고 경비원에게 부탁한 것이라는 재밌는 일화도 전해진다. 1696년 영국 조폐국의 부국장이 된 뉴턴은 조폐국이 생산하는 동전 질량의 허용오차를 크게 줄이는 등의 업적을 남기기도 했다. 조폐국에서 공직 생활 중이던 1697년, 뉴턴은 두 개의 수학 문제가 담긴 요한 베르누이의 편지를 받았다. 그중 하나가 지금도 유명한 고전역학의 최소 시간 강하선 문제다. 중력과 같은 방향으로, 수직으로 놓인 평면 위 높이가 다른 두 점이 주어져 있을 때 중력을 받아 낙하하는 물체가 이동하는 시간이 최소가 되려면 두 점을 잇는 곡선의 방정식이 무엇인지 구하는 문제다. 대학교 물리학과 2학년 과목인 일반 역학에서 지금도 중요하게 다루는 변분법 문제 중 하나다. 베르누이의 편지를 받은 뉴턴은 딱 하룻밤 만에 이 문제의 정답을 찾아 학술지 <철학회보>에 익명으로 출판한다. 논문을 본 베르누이는 “발톱만 봐도 사자의 표시인 것을 알 수 있다.”는 말을 남겼다. 이처럼 훌륭한 논문이라면 작성자가 뉴턴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단박에 알아챘다는 얘기다. 이후 영국 왕립 학회의 회장이 된 뉴턴은 학회의 재정과 운영을 정비했고, 1705년에는 기사 작위를 받기도 했다.
근대 이성의 찬란한 상징인 뉴턴의 몇 업적을 위에서 소개했지만, 뉴턴은 어쩔 수 없는 중세 유럽인이었다는 것도 책 저자가 강조하는 부분이다. 뉴턴은 연금술에 심취하기도 했는데, 아마도 킹스 스쿨 재학 당시 하숙했던 그랜섬의 약재상 클라크 씨 집에서의 경험이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1660년대 중반 <생각의 샘>에는 빽빽하게 많은 분량의 연금술 관련 내용이 적혀있고, 임종 직전까지 수백 페이지의 연금술 기록을 남기기도 했다. 연금술에 심취한 뉴턴의 의도가 금을 만들어 내겠다는 단순한 세속적 목표 때문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보편 중력으로 커다란 우주의 운동을 설명한 다음에는 작은 입자의 움직임에 대해서도 명확히 이해하겠다는 것이 뉴턴의 목표가 아니었을까. 그렇다면 하늘과 땅에서 운동과 관련한 통합 이론인 보편 중력 법칙을 찾아낸 뉴턴이 다음 목표로 작은 것과 큰 것을 아우르는 이론의 통합을 시도한 셈이다. 바로, 20세기 아인슈타인이 시도했고 지금도 많은 이론 물리학자가 찾고자 하는 모든 것을 통합하는 대통일이론을 꿈꾼 것이 그가 연금술에 매진한 진정한 이유가 아니었을지.
뉴턴은 성경 연구에도 심취했다. 성경을 읽으며 예루살렘 솔로몬 성전의 설계도를 그리기도 했다. 뉴턴이 쓴 종교와 성서에 관한 글은 무려 14만 자여서 연금술과 물리학보다도 훨씬 더 많은 분량이다. 뉴턴은 당대 교회의 삼위일체설을 부정했는데, 통일된 세 위격(성부, 성자, 성령)에 대한 숭배는 십계명의 첫 계명인 우주의 창조주 하느님은 오직 하나라는 것을 위배한다고 확신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대학 교수가 사제직을 함께 맡는 당시 관행도 뉴턴은 거절한다. 아마도 자신의 종교적 신념이 당대 교회의 교리에 반해서였기 때문일 것이다. 임종을 앞둔 시점에 교회의 임종 의식을 받지 않겠다고 한 것도 같은 이유일 것으로 짐작해 본다.
이글에서 기술하지는 않았지만 위대한 과학자인 뉴턴은 사회관계에서는 너그럽고 온화한 사람이 아니었다. 평생 결혼하지 않았으며, 로버트 후크와 오랜 기간 반목했고, 미적분의 최초 발견자 지위를 놓고는 라이프니츠와 비열한 방식을 동원해 경쟁하기도 했다. 인간의 합리적 이성의 대변자이자, 중세 유럽이라는 시대적 한계를 지닌 사람이며, 또한 인간적인 흠결도 함께 가진 뉴턴이 84세 임종 전에 남긴 아름다운 말을 아래에 적으며 글을 마친다.
“나는 세상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보고 있는지 모른다. 그러나 나 자신에게 비쳐진 나는 바닷가에서 놀고 있는 소년이었다. 거대한 진리의 바다는 아무것도 가르쳐 주지 않으면서 내 앞에 펼쳐져 있고, 나는 바닷가에서 놀다가 가끔 씩 둥그스름한 돌과 다른 것보다 훨씬 예쁜 조개를 찾으며 즐거워했다.”
*책을 읽고 함께 이야기 나눌 주제
1. 뉴턴은 현대 물리학의 토대를 완성한 위대한 이성이면서 동시에 연금술에 탐닉하고 성서 연구에 몰입한 중세인입니다. 과학과 과학이 아닌 것을 구별하는 방법이 있을까요?
2. 뉴턴이 농부가 되기를 바란 어머니는 대학 진학을 반대했지만, 학교의 교장 선생님은 대학 진학을 적극적으로 추천했어요. 만약 교장 선생님이 어머니를 설득하는데 실패했다면 우리는 보편 중력 법칙을 여전히 모르고 있을까요? 과학 법칙의 발견은 시간문제일 뿐, 결국 다른 사람에 의해서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일까요?
3. 뉴턴은 라이프니츠와 미적분의 최초 발견자의 지위를 놓고 다툽니다. 현재에는 둘이 각각 독립적으로 발견한 것이라고 알려져 있죠. 학문적 동시 발견은 우연일까요? 아니면 시대 환경의 영향일까요?
4. 연금술은 더 이상 과학으로 간주되지 않습니다. 현대에 과학으로 여겨지는 것 중에도 미래에 과학이 아닌 것으로 밝혀질 것이 있을까요?
5. 뉴턴은 주류 종교계의 교리에 동의하지는 않았지만 독실한 종교인이었어요. 종교적 신앙과 과학적 이성 사이의 관계는 어떤 것일까요? 과학이 계속 발전하면 결국 종교는 사라지게 될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