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멸의 칼날, ‘손상된 선민의식’ 회복할까 [김경훈의 시네노믹스]
아직 피차간에 문화교류가 억제되던 시절, 영화 동아리가 주최하는 일본 만화영화 상영이 있었다. 2000원인가를 내고 몰래 보던 영화가 <신세기 에반게리온>이었다. 학교 동아리실에서 비밀스럽게 보던 그 분위기는, 흡사 지하 카타콤에서 숨죽이며 예수의 복음에 귀 기울이던 옛 로마의 기독교 신자 못지않게 묘한 긴장감 속에서, 영화 보기의 집중력을 끌어올리고 있었다.
적반하장 같은 원폭 피해의 코스프레는 늘 거부감을 불러일으키지만, 안노 히데아키의 골방주의는 사실 버블 경제의 붕괴로 직면하게 될 세컨드 임팩트를 두고 벌어지는 데자뷔 같은 것이었다.
<코난>의 미야자키 하야오나 <아키라>의 오오토모 카츠히로 같은 이들을 사로잡은 집념은 원폭으로 인한 것일까, 패전으로 인한 것일까? 묻기에도 민망할 만큼 뻔한 것이었다. 오히려 안노 히데아키의 골방주의자로서의 모습이 일제가 저지른 만행과 학살로 희생당한 원혼들의 부름에 응답하는 것이었다. 적어도 연속된 사도의 공격에 단련되는 트라우마 극복기가 아닌, 무언가 되묻고 의심하는 성장기는 이른바 도덕적 성찰에 근접하는 모습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들과는 다르게 태평양전쟁의 패배를 복기하지 않고 에도막부의 소멸과 메이지유신으로 이어지는 근대를 황금시대로 노래하는 자들이야말로 일본 우익의 원조이다. 도쿠가와 막부의 출현을 다룬 <대망>과 같은 소설도 전후 복구와 경제 부흥에 발맞추는 회복 기능으로 작동하는데, 모두 한 단어를 지칭한다. 마치 고려 말이나 조선 초와 같이 민중들의 삶이 질적 전환을 이루는 과정을 추동하는 힘 또한 희망을 의미하듯이.
최근 찾아온 <귀멸의 칼날> 또한 봉건시대의 마지막 틈바구니에서 이런 희망을 좇는다. 하지만 거기에는 성찰이나 회의가 없다. 따라서 성장이나 성숙의 가능성도 희박하다. 미네르바의 부엉이 같은 미학적 쾌감의 숨 가쁜 절정도 없다. 무언가 비워내지 못하고 초자연적 존재를 향한 분노와 경외심에 동원되는 폭력적 감정만이 숱하게 나열될 뿐이다.
숭고가 사라진 월드컵 대진표와 구별하기 어렵다. 이전에도 언급했지만, 월드컵은 유럽이 2차대전의 파멸적인 국가 쟁투에서 벗어나려는 장치인데, <귀멸의 칼날>은 전쟁을 재촉하는 또 하나의 도화선에 불과해 보인다. 결국 꿈꾸던 개항 이후의 근대화 시기나 패전 이후의 경제 부흥기가 아닌 패배가 명백한 전투를 눈앞에 둔 미심쩍은 절망이 그득하다.
원폭 투하 시의 번적이는 섬광을 손에 넣고 싶은 욕망은 몬주(文殊) 프로젝트로 귀결됐지만, 동북부 지진과 해일은 지정학적 카르마를 자연재해로 치환하는, 또 다른 의미에서 정화처럼 다가왔다. 이제 그들은 원폭이나 버블 경제의 붕괴, 동북부 대지진의 과정을 겪으면서 게임에서 숭고를 뺀 즉, 역사에서 현재성을 제거하고 감정적 소비의 대상으로 만든, 게임 자체의 스코어만 남겨놓는다. 마치 메이웨더의 무패 전적처럼 기만적이다.
난 그들이 즉자적 개인화에 머무는 주관적인 칼싸움이 아니라 세계화된 개인의 연대가 필수적인 총싸움의 시대를 각성하기 바랄뿐이다. 독자적인 구도자의 길을 흉내 내면서 천재니, 천재의 유전자니 하는 것이 얼마나 우스꽝스러운 일인가?
또한 최근 유튜브에서 마치 우리를 백인과 동일시하는 콘텐츠가 난무하는 것을 보면, 20세기 후반 강력한 경제력을 기반으로 명예 백인 대우를 받는다며 자랑하던 일본이 떠오르는 것은 피하기 어렵다. 부동산 가격의 거품뿐만 아니라 백일 우월주의의 자발적 내면화도 뒤따라가는 것은 어리석고 창피한 노릇이다.
<귀멸의 칼날>에 나오는 인물들의 서사가 대부분, 뒤틀리고 분열된 에고가 “복수는 나의 것”이라는 신의 뜻에 매달리지 않고 큰 타자(A)와 대상적 타자(a)를 연속적으로 횡단하며 자유의지에 귀속하고 주체가 되는 제국주의 국가들의 상투적인 자기변명에 불과한 데 비해, 전 지구적 자본주의 경제 시스템이 직면한 인플레이션과 투자의 불안정성 문제는 과거 식민지 국가들(혹은 글로벌 사우스)의 주체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짧게는 2022년부터 길게는 2008년부터 연준이 조건화시킨 양적완화나 기준금리 인하에 길들인 자산시장은 세계화(globalization)라는 안전장치가 풀려진 지금 여지없이 인플레이션에 노출되어 있다. 불확실성에 민감하지만, 상대적으로 경험이 생경한 혹은 정보 비대칭성에 노출된 투자수요는 세계화가 해체되고 있는 와중에도 여전히 연준의 기준금리 인하에만 목메고 있다.
하지만 만성적인 인플레이션이 촉발하는 양극화와 사회적 불안정성은 경기순환이나 공황이라는 오래된 경험을 상기시킨다. 그리고 이 금리와 물가 사이의 모순은 세계화의 복원 가능성에 따라 상충관계가 완화되거나 심화하거나 한다.
달리 말하면, 미·중 간의 다툼이 격해질수록 금리 인하가 인플레이션을 폭발시키거나 금리 인상이 경기침체를 가속하거나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온건론자들은 중국이 자본시장을 개방하거나, 미국이 AI 혁명을 통해 다시 한번 산업적 도약을 하고 기축통화국으로서 지위를 유지하길 은근히 바라고 있다.
무한 증식하는 혈귀 같은 인플레이션을 단절하는 ‘귀멸의 칼날’이 세계화의 복원일지, 금리 인상일지, AI 혁명일지 알 수 없다. 하지만, 변화의 축은 기축통화국의 ‘트리핀 딜레마’나 북반구 선진국들의 노동인구 감소에서 비롯된 ‘이민자의 역설’이 불러일으키는 전쟁과 전체주의의 직면 가능성에, 자유 무역과 자본시장의 효율성을 추구하는 세계 금융자본이 어떻게 대응하는가에 달려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