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마음속 커피잔’은 진짜일까 [김범준의 세상물정]

아닐 세스의 ‘내가 된다는 것’(Being You)

2025-08-20     김범준 편집위원(성균관대 교수)
/사진=클립아트코리아

내 앞 탁자 위에 커피잔이 놓여있다. 은은한 커피 향을 맡으며 커피잔을 바라본다. 커피잔에서 반사한 빛이 내 눈의 동공으로 들어와 망막의 시각 수용체를 자극한다. 이렇게 만들어진 전기 신호가 뒤통수 쪽 시각 피질로 전해지고, 이어서 내 뇌의 여러 부분으로 전달되면서 ‘내 마음속 커피잔’의 생생한 내면의 그림이 만들어진다. 내 몸 밖에 존재하는 객관적인 물체가 주관적인 내 마음속 커피잔을 왜곡 없이 만들어 내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정말일까? 내 마음속 커피잔은 내 몸 밖 커피잔과 같은 것일까?

두개골 안 뇌의 입장에서 생각해보자. 동그란 두개골 안에는 빛도 없고 소리도 없고 냄새도 없다. 내 뇌는 단 한 번도 커피잔을 직접 본 적도 없고 커피 향을 직접 맡은 적도 없어서, 어두컴컴한 두개골 안으로는 아무런 꼬리표도 붙어 있지 않은 온갖 전기 신호가 쏟아져 들어올 뿐이다. 컴퓨터 과학과 인공 지능 분야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현재 영국 서식스대학교(Univ. of Sussex)에서 인지 계산 신경과학과 교수로 일하고 있는 아닐 세스(Anil Seth)가 멋진 책 <내가 된다는 것(Being You)>을 냈다. 책에서 저자는 ‘내 마음속 커피잔’은 외부에서 들어온 한 묶음의 전기 신호에 대해 내 뇌가 내놓은 설명이자 예측이라고 말한다. 사전에 뇌에 장착된 생성 모형은 방금 들어온 자극을 반영해서 감각 정보를 설명하는 예측을 추론해 낸다. 생생한 물성이라는 현상성을 가진 ‘내 마음속 커피잔’은 바로 뇌의 예측이다. 우리가 낫 놓고 기역 자를 보며, 뭉게구름을 보고 강아지를 떠올리는 것과 다르지 않다.

다른 많은 예측이 그렇듯 뇌가 생성한 예측도 얼마든지 틀릴 수 있다. 아래 그림을 보여주면 예외 없이 누구나 A가 B보다 더 어둡다고 단언한다. 하지만 다른 사각형을 모두 가리고 A와 B만 남기고 다시 보면 놀랍게도 둘의 밝기는 정확히 같다. 우리 뇌는 그림자 안에 놓인 B가 지금 이 밝기로 보인다면 원래는 더 밝을 것임에 분명하다는 예측을 생성한다. 눈은 B가 A와 같은 밝기라는 정보를 상향으로 전달하지만, 뇌는 A가 더 어둡다는 하향식 예측을 만들어 낸다. 2015년 사진 속 드레스가 흰색 바탕에 금색 줄무늬인지 파란색 바탕에 검은색 줄무늬인지를 놓고 한바탕 논쟁이 벌어졌던 것도 마찬가지다. ‘흰금 vs 파검’ 논쟁이라고 부르는 이 흥미로운 사건도 각자의 뇌가 가진 예측 모형이 달랐기 때문이다. 야외의 자연광과 실내의 인공 조명 중 이 사진이 찍힌 주변 환경을 우리 뇌가 어떻게 가정하는지에 따라, 우리는 같은 것을 보고도 다르게 지각한다. 빨강과 파랑은 세상에 있는 것이 아니다. 주어진 시각 정보에 대해 우리 뇌가 만들어 낸 예측으로서의 감각질이다.

/출처=위키피디아

우리는 이처럼 눈뿐 아니라 뇌로도 본다. 밖에서 안을 향해 정보가 상향으로 전달되면서 뇌 안에 장착된 생성 모델이 만들어 낸 하향식 예측과 단계적으로 비교되고 검토되면서 감각 정보를 설명하는 최선의 예측이 만들어진다. 우리는 감각 신호를 그 자체로 경험하지 않는다. 감각 신호의 최종 해석만을 경험한다. 우리가 지각하는 것은 진짜 현실을 향한 투명한 창이 아니라 현실에 의해 제어되는, 안에서 밖을 향하는 하향식 환상이다. 시각을 포함한 모든 지각은 상향식 정보의 흐름과 하향식 생성 모형 예측의 흐름이 맞물려 함께 추는 과정으로서의 춤이다. 저자가 ‘지각은 제어된 환각’이라고 말하는 이유다. 저자의 글솜씨도 참 좋다. 저자는 지각이 제어된 환각이라면, 환각은 제어되지 않은 지각이라고 말한다. 지각과 환각은 제어의 강도만 다를 뿐 연속선상에 놓인 같은 현상이라는 얘기다. 지각이 환각이라면 우리는 항상 환각 상태에 있다고도 말할 수 있다. 환각의 내용에 동의하면 우리는 그것을 현실이라 부른다.

과연 우리의 의식이 무엇인지, 각자가 생생하게 느끼는 바로 이 1인칭 시점의 ‘나’라는 것이 어떤 것인지 설명하는 것은 정말 어려운 문제다. 저자는 바로 이 의식의 현상성에 관련된 어려운 문제를 생명은 무생물과 본질적으로 다른 무엇인가가 있다고 주장했던 19세기 생기론에 비교한다. 과학이 발전하며 생명의 속성을 설명, 예측, 제어할 수 있게 되면서 생명이 초자연적 현상이 아니라는 것이 받아들여지고 결국 생기론은 자연스럽게 소멸되었다. 마찬가지로, 의식 과학의 발달로 의식적 경험의 현상학적 속성을 설명, 예측, 제어할 수 있게 된다면, 의식의 어려운 문제도 결국 소멸할 것으로 저자는 전망한다,

과학 발전의 역사는 우리 인간과 자연 사이의 불연속 해소의 역사다.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은 인간이 발붙이고 살아가는 지구가 이 넓은 우주에서 딱히 특별할 것 없는 사소한 작은 행성이라는 것을 알려주었고, 다윈의 진화론은 인간과 다른 뭍 생명 사이의 불연속성을 없애서 인간도 동물임을 깨우쳐 주었다. 인간과 자연의 연속성이 발견되어 과학이 인간을 중심에서 밀어낼 때마다 과학은 그 대가로 더 많은 것을 돌려주었다. 코페르니쿠스는 우리에게 우주를 주었고 다윈은 우리에게 가족을 주었다. 저자는 이제 의식 과학도 우리의 의식적 마음이 특별하다는 환상을 파괴하면서 동시에 우리도 자연의 일부임을 보여주고 있다고 말한다. 우리 내면의 우주는 자연과 분리된 것이 아니라 자연의 일부라는 이야기다.

제어된 환각으로서의 지각을 얘기하는 저자의 주장은 나라는 의식, 내가 된다는 바로 그 생생한 현상성에 대한 설명으로 확장된다. 나의 지각이 주로 하향식으로 전달되는 예측으로서의 제어된 환각이라면, ‘나’라는 의식도 특별한 종류의 지각이자 통제된 환각이라는 주장이다. ‘나’는 바로 자신에 대한 뇌의 제어된 환각으로서의 예측이어서, 나는 나 자신을 예측함으로써 나의 존재를 경험으로 인식한다. 빨강을 경험했다고 외부 세상에 빨강이 존재한다는 의미가 아니듯, 통일된 자아를 경험한다고 ‘진짜 자기’가 존재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내가 된다, 당신이 된다는 경험은 여러 얽힌 지각 그 자체다. 의식은 특별한 종류의 예측이며, 특별한 지각으로서의 의식은 내 머릿속 허깨비다.

/흐름출판

저자는 비트겐슈타인이 나눈 대화를 소개하면서 사물이 어떻게 보이는지가 반드시 사물이 실제로 그러함을 말해주지는 않는다고 말한다. 우리가 사물의 실체를 더 깊이 이해하더라도 일정 수준에서 사물은 여전히 똑같아 보인다. 의식은 허깨비지만 허깨비라는 깨달음으로 갑자기 사라지는 허깨비가 아니다. 내 삶의 매 순간 나와 함께 살아가는 의식이 내 머릿속 특정한 환각으로서의 허깨비라면, 내가 바로 그 사라지지 않을 허깨비다.

저자는 의식이 꼭 지능과 관련될 필요는 없다고 강조한다. 지능의 수준이 인간에 미치지 못하는 많은 동물도 내부에서 자신이 된다는 것에 관련된 현상성을 만들어 낸다면 의식적인 존재로 봐야 한다는 주장이다. 의식은 있고, 없고를 딱 잘라 양분할 수 있는 것이 아니어서, 지구의 많은 생명은 하나의 숫자로 표현하기 어려운 다양한 내용과 수준의 의식을 갖는다. 저자는 또 의식적인 마음은 몸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다고 말하면서 요즘 인공 지능 분야에서 일부가 주장하는 의식의 기질 독립성에 반대한다. 아무리 우리가 보기에 엄청난 지능을 가진 듯한 출력을 생성하는 인공 지능도 살아있는 몸이 없다면 의식 있는 존재라고 할 수 없다는 주장이다. 데카르트는 의식 없는 기계 장치로서의 비인간 동물을 주장하는 동물기계론을 주창했다. 저자의 동물기계론은 동명이지만 거꾸로다. 바로 우리 인간이 동물기계라는 주장이다. 우리는 동물기계이기 때문에, 바로 몸이라는 구체적인 신체가 있기 때문에, 의식적인 자기가 된다는 주장이다. 내가 된다는 것, 나라는 1인칭 시점의 현상성은 내가 가진 몸과 한 몸이다. 몸이 없다면 의식도, 그리고 나도 없다.

저자는 우리의 의식적 경험은 신체나 세상 같은 자연의 일부이며 우리의 삶이 끝나면 당연히 그리고 자연스럽게 의식도 사라진다고 말한다. 책의 ‘들어가는 말’의 마지막 문장은 수많은 사람이 시청한 저자의 테드(TED) 강연 마무리와 정확히 같다. “의식의 끝이 온다고 겁먹을 것은 아무것도 없다. 정말 아무것도 없다”. 내 생각도 같다.

*책을 읽고 함께 이야기 나눌 주제

1. 자의식 없는 의식을 상상할 수 있을까요?

2. 의식과 지능의 관계는 무엇일까요? 일정 수준의 지능 없이 의식이 가능할까요?

3. 의식의 경험도 결국 지각의 한 종류이며, 모든 지각은 예측 오류를 줄이는 최선의 추론일 뿐, 제어된 환각이자 제어하는 환각이라고 저자는 주장합니다. 우리 모두가 늘 경험하는 생생한 의식의 현상성을 저자는 정말로 설명한 것인가요?

4. 신경세포 하나는 의식이 없지만 우리는 의식을 경험합니다. 인터넷으로 연결된 우리 모두의 마음과 의식을 상상할 수 있을까요?

5. 의식에 대해 제대로 이해하고 나면 의식이 사라지는 죽음의 순간을 두려워할 필요가 전혀 없다고 저자는 말합니다. 이 책 읽고 나니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사라졌나요?

6. 저자의 real problem을 역자는 실재적 문제로 번역했어요. 철학의 실재는 존재 자체에 대한 것이어서, 저자가 real problem 접근법으로 궁극적으로 해소하고자 하는 의식의 존재를 ‘실재’로 보는 듯한 어감을 갖게 됩니다. 저자의 real problem을 실제적 문제, 현실적 문제, 혹은 진짜 문제로 번역하는 것은 어떨까요?

7. 의식의 상태는 기질의 특정 배열과 같거나, 특정 배열의 기질에서 의식이 발생한다는 것이 물리주의의 입장입니다. 의식은 특정 배열일까요, 아니면 특정 배열에서 발생할 뿐 배열 자체는 아닌 것일까요?

8. 우리가 세상을 제대로 이해했다고 해서 세상이 달리 보이는 것은 아니라는 비트겐슈타인의 대화를 소개하면서 저자는 의식이 어떤 것인지 이해해도 우리는 의식을 지금과 마찬가지 방식으로 경험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우리 각자가 바로 이 순간 느끼는 의식의 생생한 현상성은 의식 과학이 크게 발달한 먼 미래에도 여전히 남아 있을까요?

9. 의식의 경험을 설명하고, 예측하고, 제어할 수 있게 되면서 의식 과학의 어려운 문제는 점차 소멸할 것이라는 저자의 전망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해답 없는 해소가 가능할까요? 먼 미래에도 우리는 여전히 어려운 문제에 대한 답을 추구할까요?

10. 측정법은 질적인 것을 양적인 것으로, 막연한 것을 명확한 것으로 바꾼다고 저자는 말하면서 의식 측정법의 필요성을 강조합니다. 알면 잴 수 있지만, 잴 수 있다고 아는 것일까요?

11. 토노니의 통합 정보 이론은 의식이 통합된 정보 자체라고 말합니다. 통합된 정보에서 의식이 발생한다는 이야기보다는 훨씬 더 강한 주장이죠. 여러분은 동의하시나요?

12. 통합 정보 이론은 의식의 기질 독립성 주장과 어떻게 관련되나요? 범심론과는 어떻게 관련되나요?

13. 데이비드 흄은 연쇄적으로 일어나는 사건에 대한 반복적인 지각에 대해 우리가 세상에 부여하는 것이 인과성이라고 말합니다. 인과성은 지각적 추론일 뿐이라는 얘기죠. 물리학의 근간을 이루는 인과성도 마찬가지일까요? 물리학의 인과성도 흄의 인과성과 마찬가지로 우리 밖에 존재하는 객관적 대상의 진실한 속성으로 볼 수 없는 것일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