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린 먹는 OTT처럼… 부동산 지고 금융자본주의 뜰까 [김경훈의 시네노믹스]
‘네이키드 런치’, 영화관은 정말 다 사라질까
데이비드 크로넨버그의 <네이키드 런치>는 그가 작가로서의 아우라를 발하기 전의 치기(雉氣) 아니면 일종의 견적서 같은 것이다.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스>가 기본 얼개를 이루고 카프카의 <변신>,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등이 계속해서 틈입하지만, 그들 모두는 ‘의식의 흐름’ 기법의 대가들로서 유럽 문명의 전 고점이자 다시 도달할 수 없는 지점이다.
작가에겐 강박이 될 수 있는 타자기가 모티프로 작용하고 글쓰기의 신기원들이 의지한, 신대륙에서도 여전한 계급 간 차별, 불륜에 탐닉하게 되는 쾌감의 기원, 천국보다 낯선 마약, 쾌락 법칙을 벗어난 죽음충동, 이국의 뒷골목이 주는 미로 같은 두려움, 동성애의 상호 파괴적 기전, 환상보다는 환각이 주는 단속성 등이 번잡하게 나열됨으로써 오히려 집중을 흐트러뜨리지만(예를 들면, 글을 써보라는 검문소 경계병의 요구에 다시 조앤에게 총을 겨누는), 그의 연출력과 화면구성은 사실상 대가의 그것이라고 할 만하다.
영화가 스크린에서 OTT(Over-the-top media service, 온라인 동영상 서비스)로 숨어들면서 개인화는 영화에서 공간의 비장소성(non-place)을 가속한다. 흔히 말하는 이런저런 세계관의 범람이 역사를 의식하지 않는 텅 빈 공간을 의미하게 되자 공허해지고 개연성과 설득력은 점점 더 센세이셔널리즘 속에 파묻힌다.
영화에서 뿜어지는 재현과 추상의 변증법적 관계는 상당 부분 공간을 어떻게 다루느냐에 따라 형상화 여부가 판가름 난다. 최근 스크린의 아우라가 희미해져 가고 있는 것은 영화를 보는 관객의 눈이, 관객의 자의식이 발진(發疹)하고 있다는 것과 다름없다.
그런 면에서 경험이 지니는 객관성이 주관의 범주 쪽으로 넘어가는 것이다. 하지만, 영화가 인간 삶의 질곡과 무관해지지 않으려면 영화 보기는 일회성의 제한에 매달려 있을 때, 되돌릴 수 없다는 안타까움이나 상황이 주는 압박감 따위가, 그 실감이 증폭된다. 영화 읽기는 사후적이어야 총체적이다. 그런 면에서 영화를 보는 도중에 휴대전화를 꺼내 무언가 검색해 보는 것은 너무 탈 몰입적이고 영화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
더불어 OTT의 기세가 누그러지지 않는 것은 지난 몇 년간 우리 사회에 팽배했던 편협한 엄숙주의나 유사 이념대결에 따른 암묵적인 자기검열 때문이기도 하다.
그러한 검열이나 폐쇄적인 언론통제가 익숙한 중국에서 최근 브릭스(BRICS) 회담에 참석하지 않는다는 보도를 낸 시진핑의 실각 가능성은 이로 말미암아 더 높아졌다고 짐작할 수 있다. BRICS의 성공적인 역내 교역 및 교류 등의 협력 확대는 그의 ‘일대일로’나 ‘진주목걸이’ 전략 정책에 비하면 그 성과가 명확하게 드러나고 있기 때문이다.
그가 3기 연임에 만족하지 않고 군부 내의 잠재적인 경쟁자를 제거하려다 역공당했다거나 코로나19 봉쇄기에 자본가를 탄압하는 모습을 드러냄으로써 외국 자본의 엑소더스를 초래했다거나 하여 안팎의 적에 둘러싸여 실각하게 되었다 할지라도, 그는 중국 산업의 미래를 확보하는데 이바지했다고 말할 수 있다.
‘중국제조 2025’나, ‘신질생산력’(New Quality Productive Forces)같은 산업적 비전을 제시하고 더하여 부동산 거품을 붕괴시키고 자본시장을 활성화하겠다는 방향성을 정립했기 때문이다. 물론, 이로 말미암아 민심이 이반하고 군부와 원로그룹의 결탁에 의한 반격의 틈이 만들어졌겠지만 말이다.
동아시아의 두 강대국 중국과 일본에서 결국 부동산 시장의 버블 붕괴가 정권의 불안정을 열어젖혔다는 것은, 우리에게 충분히 눈여겨볼 만한 점이다. 지금까지는 우리만이 1997년의 외환위기나 2008년 금융위기가 초래한 부동산 시장의 급격한 조정을 이겨내고 산업의 혁신을 달성했기 때문이다.
그동안 칼럼을 통해서 입이 닳도록 언급해 온 부동산 자본주의에서 금융자본주의로의 이행은 스크린에서 OTT로의 전환과 비슷한 측면을 갖고 있다. 특히 농경 민족에게 토지라는 공간 관념은 과잉이나 잉여라는 단계를 결코 받아들이지 못하게 하는 허들이기 때문이다. 그러한 지대(地代) 자본주의는 약탈적인 산업·금융자본주의의 손쉬운 먹이가 될 뿐이었다.
중국과 일본이 각각 1인 통치시대의 종말을 고하고 집단지도체제로의 복귀를 모색하거나 봉건적인 기업지배구조의 내구성을 소진하는 장기 디플레이션으로부터의 탈피를 모색하거나 모두 구체제와의 결별을 내포하고 있다.
그럼 우리는 어떠한가? 취조실에서의 우월적 지위와 권력을 사회 일반으로 확대 유지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오인할 만큼 몽매한 정치집단의 준동을 극복하고 전쟁 국가로의 진입을 차단하고 민주주의를 복원했다고 하지만, 여전히 20~30대의 주택에 대한 영끌 식 투자와 50~60대의 상가에 대한 맹목적 투자가 가져온 소비위축과 경기침체는 벗어날 길이 없어 보인다.
1997년의 고통 분담이나 2008년의 재벌(사실상 다국적 기업)이 보여준 산업 경쟁력은 말 그대로 신화가 되어 버렸다. 2020~2021년 코로나 사태에서 어쨌든 목격하게 된 자산 가격의 V자 반등이나 장기 우상향이라는 환상을 품고 있는 부동산 투기 시장의 플레이어가 거의 100만명에 이를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부동산 투기 시장은 독립적·내생적으로는 깨뜨릴 수 없게 돼버렸다.
정부의 6·27 대책은 외부 쇼크와 조응할 때 단임제 정부의 한계를 극복하고 산업구조조정이라는 진정한 목표를 달성할 수 있다. 그 쇼크는 트럼프의 상호 관세와 인위적인 환율 조정, 그리고 파월을 압박하는 금리인하가 가리키는 인플레이션과, 좀 더 거칠어진 지정학 위험과 G2의 무역전쟁 등이 불러오는 불확실성 증대와 교역량 감소 등에서 비롯되는 경기침체가 결국은, 미국채에 대한 채권수익률을 높임으로써 또 다른 금융위기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는 데 있다.
문득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중국의 권력구조 개편, 일본의 대지진 예고, 트럼프의 보복관세 등 2025년이 새삼스럽게 느껴지는 초여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