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과 진실’… 오, 클림트! [강태운의 빛과 그림자]
사랑은 어떤 모습일까. 우리는 사랑을 어떻게 품고 있을까.
갓난아이를 품에 안았다. 상상 이상으로 조심스럽다. 힘을 주면 아이가 잘못될까 무섭고, 힘을 빼면 아이를 놓칠까 두렵다. 마음이 조마조마하니 몸이 뜻대로 움직이지 않는다. 손끝이 떨리면, 아이를 선뜻 품에 안지 못한다. 사랑은 그렇게, 조심스러운 떨림으로 시작된다. 사랑은 감정이지만, 단순한 감정에 머물지 않는다. 그 앞에서 우리의 몸과 마음은 중심을 잃는다. 사랑은 중심을 흐트러뜨릴 정도로 진심을 쏟게 만드는, 깊은 떨림이다. 그 떨림을 수없이 몸에 새기며 우리는 서로 사랑한다.
사람이 사랑을 품고 살아가는 일이 인생(人生)이다. 그래서 인생은 떨림의 연속이다. 떨림은 그 자체로 불안스러운 전율이지만, 떨림이 멈추는 순간은 상상하기 어렵다. 인생을 하나의 존재로 의인화해서 의식을 부여한다면, 인생은 우리에게 이렇게 하소연할 것 같다. ‘내 뜻대로 되지 않았어.’ 힘을 줘야 할 때와 빼야 할 때를 구분하는 게 세상을 사는 지혜다. 그러나 정작 힘을 줘야 할 때는 힘을 빼고, 힘을 빼야 할 때는 힘을 주는 게 사는 동안 우리가 하는 일이다. 그러니 아무리 나이가 들어도 부모님 눈에는 우리 모두 어린 자식이다. ‘조심해야 한다.’ 그 말 속엔 말로 다 전할 수 없는 시간이, 사랑이, 떨림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떨림은 ‘조심’(操心)이 몸에 드러나는 구체적인 형식이다. 한자로 잡을 조(操)는 손 수(扌)와 울 조(喿)가 합쳐진 글자다. 울 조(喿)는 입 구(口) 세 개와 나무 목(木)이 모여서 만들어진 형성자다. 그래서 잡을 조(操)는 나무 위에 있는 새를 손으로 잡는다는 뜻이다. 새를 잡을 때는 조심해야 한다. 힘을 주는 것은 새를 잡아서 지키는 일이며, 힘을 빼는 것은 나로부터 새를 지키는 일이다. 상호성을 가진 모든 관계가 그렇다. 자기 자신과의 관계도 마찬가지다. 너무 몰아붙이면 숨을 쉴 수 없다. 너무 내려놓으면 숨 쉬는 욕구마저 잃어버린다. 그나마 실낱같이 이어지던 관계마저 끊어진다.
그 조심이, 그 떨림이, 시간을 지나며 어떤 얼굴로 드러나는지를 보여 주는 그림이 있다. <여성의 세 시기>는 삶의 순환을 상징하는 그림으로 클림트의 황금기에 속하는 작품이다. 클림트는 아이, 젊은 여성이자 엄마, 노인이라는 세 시기의 여성을 감각적으로 묘사했다. 삶의 순환을 상징하는 장치는 여러 곳에 등장한다. 아이와 엄마는 밀착되어 생기가 돌지만, 나이 든 여성은 두 사람과 분리되어 홀로 떨어져 있다. 젊은 여성은 눈을 감은 채 몸을 살짝 기울여 아이를 안고 있다. 그 품에서 힘을 주지 않고도 무너지지 않는 어떤 중심이 느껴진다. 그 곁에서 노파는 얼굴을 가리고 고개를 숙이고 있다.
젊음은 언제 보아도 싱그럽다. 시선은 자연스레 가운데 젊은 여성에게로 향한다. 클림트가 묘사한 젊은 여성은 단순한 육체의 아름다움을 넘어서, 사랑의 감각이 가장 충만한 순간을 상징한다. 붉은 꽃무늬로 장식된 배경은 생명의 생생함과 감각의 풍요로움을 시각적으로 강조한다. 살결은 따뜻하고 부드럽게 표현되어 있으며, 그녀의 몸은 단단하면서도 고요한 생명력을 품고 있다. 그녀는 경직되어 있지도 않고, 감정에 짓눌려 있지도 않다. 그녀의 얼굴에는 어떤 결심도, 감격도, 불안도 없다. 그 품 안에 잠든 아기는 더없이 평화롭고 안정된 상태로 존재한다. 평온한 아이 모습은 엄마 품은 물론, 자연스러운 세상 일부로 수용되었다고 느끼게 한다. 주변의 시선은 아랑곳없이 엄마의 심장박동 위에 놓인 채 아이는 단잠을 잔다.
클림트는 나이 든 여성을 믿기 어려울 만큼 사실적으로 묘사했다. 근육과 생기를 잃은 몸, 튀어나온 핏줄과 굽은 등을 통해 생의 마지막이 멀지 않았음을 보여 준다. 주름지고 휘어진 육체는 시간이 남긴 진실이다. 처진 피부와 튀어나온 배, 생기를 잃은 회색 머리카락. 잎사귀를 다 떨군 채 서 있는 고목처럼 보인다. 무엇보다도 이 인물은, 그림의 화면 바깥에 걸쳐 선 듯한 구도 속에 자리한다. 노인은 마치 그림 바깥을 향해 서 있으면서도, 고개를 숙인 채 안을 들여다보는 중이다. 이 기묘한 위치는 단순히 노파가 배제되었다는 사실을 넘어선다. 그녀는 ‘지나온 생’을 바라보는 자리, 혹은 더 이상 다가설 수 없는 경계 위에 서 있는 듯하다.
특히 내 시선이 머무는 곳은 그녀의 손이다. 얼굴을 가린 왼손은 움켜쥔 채 굳어 있다. 힘없이 아래로 떨어진 오른손은 마지막 끈을 놓지 않으려는 듯 허벅지를 붙들고 있다. 상실감을 주체하지 못하는 그녀의 마음이 전해온다. 순간 그 주름진 손이 떨리는 것처럼 보였다. 나는 그 떨림에 정색하고 자리를 뜨지 못한다.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어떤 떨림, 지금 내 안의 떨림, 혹은 이미 지나간 떨림까지, 분명 내가 몸으로 느꼈던 바로 그 떨림이었다. 너를 잃지 않으려 할 때, 혹은 나를 놓지 않으려 애쓸 때, 긴장과 불안 속에서 지냈던 나날들이 생생하게 밀려왔다.
클림트는 이 노파의 몸을 통해, 육체의 쇠락이라는 잔혹한 사실과 그 속에서 일어나는 감정의 진실을 동시에 보여 준다. 그림에서 나이 든 여성은 왼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있다. 차마 엄마와 아이를 쳐다보지 못한다. 이제 그녀에게서 느껴지는 떨림은 흐느낌 뿐이다. 어디서부터 어긋났을까? 당면한 현실은 그때 그곳의 조각에 불과하다. 상황이 급하게 돌아가면, 눈앞에 보이는 조각을 붙들고 씨름한다. 전체와 조각 사이의 관계를 고려하지 않고 조각에 불과한 사실 그 자체에 갇혀 살게 되면 어느 순간 떨림은 사라진다. 보이는 사실에 얽매여 보이지 않는 진실을 놓치고 살았다.
<여성의 세 시기>는 우리에게 삶의 전(全) 단계를 보여 준다. 클림트가 정말로 말하고 싶었던 것은, 단순한 생애 주기가 아닐 것이다. 클림트는 삶의 흐름 안에서 우리가 얼마나 떨리며, 얼마나 조심스럽게 서로를 받아들이는가를 묻고 있다. 우리가 그림을 읽는 건 단순한 사실을 뛰어넘어 깊은 심연으로부터 울려오는 진실의 목소리를 듣기 위해서다. 사실은 보이는 것이고, 진실은 감각되는 것이다. 떨림은 진실의 징후이고, 조심은 그 진실에 다가가는 태도다. 노파의 손에서, 엄마의 손에서 눈꺼풀에서, 아이의 잠든 입술에서 우리는 그 떨림을 느낄 수 있다. 그 떨림을, 그 사랑을, 새를 쥐듯 조심히 여길 때, 우리는 끝까지 서로의 곁을 지킬 수 있다.
떨림이 조심으로 이어져야 사랑은 깊어진다. 반대로 떨림이 사라진 자리는 후회와 질투로 채워진다. 늙어버린 내 시간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고개 숙인 자의 진실은 무엇일까? 엄마와 아기의 눈부신 생동 앞에서, 그녀는 말이 없다. 다만 고개를 숙일 뿐. 한없이 늙은 진실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