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년공 대통령’이 굴려 나가야 할 ‘두 가지 수레바퀴’ [김경훈의 시네노믹스]
영화 ‘마셜’, 그리고 ‘Strange Fruit’
“남부의 나무에는 이상한 열매가 열린다네 / 잎사귀와 뿌리에는 피가 흥건하고 / 남부의 따뜻한 산들바람에 검은 몸뚱이들이 매달린 채 흔들린다네 / 포플러나무에 매달려 있는 이상한 열매들”(빌리 홀리데이 ‘Strange Fruit’)
오래전 윤대녕의 <은어낚시통신>을 읽다가 빌리 홀리데이의 ‘I’m a Fool to Want You’라는 노래를 듣게 되었다. 그게 다였는데, 마이크 타이슨이 감옥에 갔다가 나오면서 한 인터뷰에서 “빌리 홀리데이의 노래를 감옥에서 많이 들었고 그녀의 노래를 들을 때면 가슴 한편이 통렬(痛烈)해진다”라고 말하는 것이 아닌가. 그 노래가 ‘스트레인지 프룻’(Strange Fruit)이다.
영화 <마셜>엔 그 노래의 한 구절이 흑인 피의자의 입을 통해서 되뇌어진다. 그는 미국 남부 어느 백인 부자의 운전기사였는데, 남편이 출장 간 사이에 그의 부인을 겁탈하고 죽이려 했다는 혐의를 쓰고 있었다.
사실은 그녀와 일순간 눈이 맞아 벌인 화간이었지만, 당시에는 흑인 운전기사가 백인 여자를 겁탈했다는 것보다 백인 귀부인과 연애했다는 것이 더 받아들여지기 어려웠다. 그래서 그 흑인 운전기사는 이중의 방어를 해야 했다. 강간하지 않았다는 것과 연애하지 않았다는 것. 이 딜레마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법정에서의 형벌보다 목련나무에 목이 매달리는 린치의 두려움을 이겨내야만 했다.
마찬가지로 우리 사회가 보수와 진보라는 변증법적 운동 과정에서 항상 작동시켜야 하는 두 가지 방어기제가 있다. 정책목표가 올바른 당위성을 갖고 있다는 것과 그 주체가 도덕적 흠결이 없다는 것. 그 뿌리는 깊고 멀다. 조선 후기 노론과 소론의 대립은 한국전쟁이 끝나고도 한참 동안 5·16 군사 쿠데타가 터질 때까지 사회의 지배적 관념에 얼룩으로 남아 있었다. 그 얼룩은 강렬해서 늘 언제나 명분이 실리를 움츠러들게 하였다.
스스로를 백인에게 감정 이입한 우리에게 흑백 문제는 인종차별보다는 미국이라는 패권국가의 주류인 ‘WASP’(White Anglo-Saxon Protestant)에 대한 관계를 되짚어보게 하는 분광기 같은 역할을 한다. 미니시리즈 <뿌리>나 영화 <만딩고>를 보고 나서야 겨우 우리의 미적·윤리적 선호 질서가 철저히 백인우월주의에 사로잡혀 있다는 의심을 하게 된다.
동시에 인종차별은 미국의 약한 연결고리였는데, 오바마가 연임에 성공하고 터부를 무너뜨리며 금기의 영역 밖으로 나왔을 때는 미국 사회의 미래지향적 운동에 감탄했다. 마셜은 흑인 최초의 연방 대법관으로 알려진 인물이다. 그는 젊은 시절 ‘NAACP’(National Association for the Advancement Colored People)의 일원으로서, 다른 이유 없이 오로지 흑인이기 때문에 무고하게 누명을 쓴 사람들을 변호하고 있었다. 그가 다룬 사건 중에서 인종 간에 성적 금기를 둘러싼 억압이 어떻게 극복되는지 보여주는 영화이다.
마셜에서 오바마까지 70년, 2세대가 걸려서야 비로소 하나의 차별적 성역이 무너진다. 마찬가지로 우리에게도 80·90년대 인권변호사의 활동은 수많은 금기와 억압을 돌파하는 과정이었다. 우리에게는 미국에 없는 역사의 깊이가 있지만, 민주주의의 산업적 기반은 월가와 빅테크, 언론과 할리우드의 지지를 받는 미국에 비하면 너무 허약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결핍이 만들어내는 역동성은 산업자본과 연계된 수많은 카르텔에 또한 균열을 일으킨다. 지난 수년간 이른바 건설 카르텔, 법조 카르텔, 그리고 언론 카르텔이 우리 사회경제를 지체시킨 상처는 이제 진정한 파국 단계를 대면케 한다.
옛 미국과 일본의 플라자 합의는 다음과 같은 체인으로 이어지는 수레바퀴를 돌렸다. 통화가치의 평가절상 > 수출감소에 따른 경기침체를 완화하기 위한 금리인하 > 인플레이션과 이에 따른 부동산 및 자본자산 가격의 상승 > 인플레이션에 당황한 급격한 금리 인상 > 자산 가격의 폭락으로 인한 버블 붕괴 > 30년간의 디플레이션과 제로금리가 그것이다.
이제 우리가 직면한 신플라자 합의(마라라고 합의)는 위와는 다른 국면에서 전개된다. 이미 2년 가까이 진행된 경기침체 속에서 인위적인 통화가치의 평가절상에 맞닥뜨렸는데, 우리가 굴리는 경제의 수레바퀴는 어떻게 굴러갈 것인지?
고이즈미에서 아베까지 일본의 귀족적 지도부는 재정 확대 정책 대신 금리를 변수 삼아 경제를 운용했지만, 우리가 새롭게 맞이하는 정부는 금리가 아닌 정부지출을 주요 정책 수단으로 사용하길 바랄 뿐이다.
뱀처럼 똬리를 틀고 얽혀있는 건설·언론 복합체는 금리인하를 집요하게 획책하겠지만, 그리고 산업화 이전 동북아시아에서 오랫동안 지속된 중앙집권적인 관료 체제와 인구구조는 토지에 대한 자본집약도를 폭발시켰지만, 더하여 한국전쟁 이래 산업화와 민주화를 달성한 지난 70년 동안의 행운은 더 이상 우리 편이 아니지만, 우리에게는 서유럽과 미국 외에는 대부분의 나라가 도달해 보지 못한 헌정질서와 민주적 절차에 의한 정권교체가 가능케 하는 활발한 사회경제 시스템의 신진대사가 있다. 그리고 이것이 투자의 불확실성을 감수케 하는 혁신의 진정한 동인이 될 것이다. 마치 미국이 흑인 대통령을 선출해 경제위기를 극복하고 기업의 혁신을 이뤄냈듯이.
그 와중에 두 가지 마음이 출몰할 것이다. 상대방에 대한 오래된 미움과 공공선이 아닌 부동산 가격의 하락만을 걱정하는 이기심이다. 그러니 새 정부가 미움과 이기심의 바다를 헤쳐 나갈 때는 즉자적인 대책(포퓰리즘)이 아니라, ‘법(法)과 시장(市場)’이라는 수레바퀴를 굴려 가길 기대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