겸재 정선, 진경(眞景)이란 [강태운의 빛과 그림자]
오늘날 겸재 정선 하면 누구나 진경산수화를 떠올린다. 한 사람의 예술세계를 하나의 틀에 가두는 것을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가. 관념을 벗어나 진경을 추구했던 겸재를 정작 우리는 관념적으로 대하는 중이다. 모든 행위에는 그 의미와 목적에 대한 관념이 내포되어 있다. 관념의 파괴력은 그것이 획일화된 믿음으로 굳어질 때 드러난다. 겸재 정선, 어떻게 읽어야 하나?
‘동양화는 보는 것이 아니라 읽는 것이다.’ 한국의 미(美)에 관심을 두는 사람이라면 그냥 지나칠 수 없는 문장이다. 대상을 단순히 재현하는 것이라면 보는 것으로 충분하지만, 비유와 상징을 통해 화가의 생각과 뜻을 담으려 했다면, 읽는 것이 맞는 독법(讀法)이다. 하지만 산수화 앞에서 잡히지 않는 무언가를 읽으려 애쓰던 기억은 선명하다. 보는 것조차 쉽지 않은데 읽으라니, 마음만으로 되는 일이 아니었다. 동양화를 읽으려면 시선은 오른쪽 위에서 시작해 왼쪽 아래로 훑어 읽는 것이 좋다고 한다. 예전에는 글도 그렇게 써 내려갔다. 글의 방향뿐이겠는가. 시대는 변했고, 상징은 달라졌다. 독법도 그에 맞춰 달라져야 한다.
오늘날 조선 시대 산수화는 관념의 소산으로 비판받는다. 내가 직접 경험하지 않고, 내 생각을 투영하지 않은 채 관념적으로 선취된 이상을 향해 근거 없이 도취했다는 자성의 목소리다. 이상적 가치란 관념적으로 재구성된 것일 뿐이며, 하루가 다르게 변하는 현실과 괴리되기 마련이다. 세계 운동의 본질은 끊임없는 변화이기 때문이다. 내가 경험하지 않고, 내가 참여하지 않는 세계. 그렇게 인식 주체인 ‘나’는 소외되고, 심지어 자신이 소외되었다는 사실조차 인식하지 못하는 위험이 관념 세계에는 내재한다.
산수화가 은일고사(隱逸高士)의 삶을 동경하며 그려졌다는 인식도 관념성에 대한 비판적 시선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결국 팔자 좋은 선비들의 놀이터였을까. 과거를 읽는 독법에서 자주 놓치는 것은 시제(時制)다. 산수화가 지배 계층의 이해관계를 대변하고 있었다 하더라도, 오늘의 시각으로 그것을 규정하고 단죄할 수는 없다. 당시 산수화는 지식인들이 추구하던 이상적 정치관을 시각화하고 마음에 새기는 과정이었다. 십 년 전 내 삶이 녹록지 않았듯, 100년 전, 1000년 전 그들의 삶 역시 순탄치 않았다. 산수화는 엄혹한 삶의 현장을 견디게 하는 버팀목이었을 것이다.
관념성에 대한 비판은 어느 시기에도 있었지만, 조선 후기로 가면서 상황은 달라진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의 충격 이후, 무능한 정치와 현실과 괴리된 지배 계급의 관념성에 대한 반성은 필연적이었다. 이상에 기대어 마음을 붙잡던 시대를 넘어, 현실을 직시하고자 하는 움직임이 나타났다. 일반 백성들마저 판소리를 비롯한 국문학의 부흥을 통해 주체적 의식을 키워갔다. 사회적 책무를 의식한 지식인이라면, 시대의 요구에 응답하고자 애썼을 것이다. 관념으로 치닫던 조선 사회에 현실적 질문을 던지고, 실제적 답을 구하는 풍조가 서서히 도래하고 있었다.
진경산수화는 이런 사회적 토대 위에서 싹을 틔웠다. 실제를 바탕으로 한 참된 풍경이라고 해석해 온 진경(眞景)은 ‘관념을 벗어나 사실을 추구하는 사회 풍조’라는 개념으로 바뀌게 된다. 진경산수화는 현실을 그대로 재현하는 데 그치지 않고, 현실을 비판적으로 재구성한 그림이다. 불합리한 사회 현실에 대한 치열한 문답 과정이며, 그 과정에서 발견한 실재(實在)를 증거하도록 화가가 실제 풍경을 재구성한 것이다. 진경은 세상을 보는 관점의 변화이며, 관점이 변하면 가치관과 행동양식의 변화가 뒤따른다. 이를 통해 우리 자신은 물론 우리 산천을 주체적으로 인식하는 계기가 마련되었다.
그 거대한 변화의 자리에 겸재 정선이 있었다.
겸재는 조선 후기 대표적 화가이자, 사대부 문인의 품격을 지닌 예인이었다. 광주 정씨 가문은 한때 학문과 덕망을 겸비한 명문으로 이름났으나, 겸재의 대에 이르러 가세는 쇠락의 길을 걷는다. 중조부 정세기(鄭世紀)는 벼슬을 마다하고 은거하다 마흔에 요절하였고, 조부 정양(鄭瀁)과 부친 정환(鄭渙)도 과거에 나아가지 못해 관직과는 인연을 맺지 못했다. 정통 사대부 가문의 자긍심은 남아 있었지만, 현실적 지위와 생계는 점차 위태로워졌다.
이런 겸재가 당대 문예를 선도하는 당당한 문인화가로서 발신할 수 있었던 데에는 장동 김씨 가문의 역할이 지대했다. 장동 김씨는 조선 후기 정치·사회·학예의 중심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한 문벌로, 숙종조의 경신, 기사, 갑술환국과 영조 초기 노론 정국 속에서 확고한 지위를 누렸다. 김창협과 김창흡 형제를 비롯한 유학자들이 대거 배출되었고, 겸재는 이 학맥과 문화적 교류 속에서 입지를 다져갔다.
겸재(謙齋)라는 호에서 드러나듯, 그는 겸손과 절제를 아는 사람이었다. 사람됨이 모질지 않았고, 어떤 일에도 허허 웃어넘기던 그를 친구들은 호호 노인이라 불렀다. 늘그막에 지방 현감으로 출사했지만, 행정 평가에서는 늘 하위권을 맴돌았다. 숙종조에서 정조 치세에 이르는 125년의 조선 정치사는, 거듭되는 사화와 환국 속에 조정의 권력 축이 극심하게 요동치던 시절이었다. 겸재를 둘러싼 장동 김씨의 정치적 부침에 따라 그의 이력과 화업 역시 크고 작은 영향을 받았다. 겸재는 그들과 시를 주고받고, 그림을 통해 학문적 교유를 나누었지만, 그들에게 정치적 자산이 되는 인물은 아니었다. 그들에게 겸재는 창문 너머로 보이는 사람이었지, 문 앞까지 불려 들어가 쓰이는 재목은 아니었다.
보통 위인들이 거대한 사건의 중심에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들이 사건을 몰아가는 힘을 제공하지는 못한다. 사람보다는 그 사람이 차지하는 역할이 중요하다. 그 역할은 거대한 사회적인 힘들이 충돌하는 자리이며, 그 자리에서 충실히 자기 역할을 한 사람이 위대한 사람이 된다. 아무리 위대한 화가라 할지라도 한 시대의 특징을 그 한 사람이 주도했다는 건 폭력과 다름없다. 겸재는 자기에게 주어진 사명에 충실했던 사람이었다.
진경(眞景)은 겸재 사후에 쓰인 용어다. 당연히 겸재는 진경이 무엇이라 말한 적이 없다. 그렇다면 겸재에게 진경은 무엇이었을까. 젊은 날 꿈꾸던 이상은 현실과 괴리가 컸다. 이상보다 현실은 매우 경직되어 있었다. 이 땅 위에 그 부족함을 채워 넣고 싶었다. 그것이 이상과 현실의 지혜로운 조화라고 생각했다. 그리면 그릴수록 땅은 조화 그 자체였다. 눈 앞에 펼쳐진 산수(山水)는 진보와 보수, 좌와 우, 현실과 이상이 조화로운 곳이었다. 결코 인간이 가닿을 수 없는 진경. 겸재는 땅을 닮고자 했다.
겸재의 작품을 읽는 동안 우리는 겸재와 관계를 맺는다. 관계의 최고 형태는 그와 동일한 입장에 서 보는 것이다. 겸재가 어느 지점에서, 어떤 시선으로, 어디에 초점을 맞춰서 세상을 인식했는지 살펴보는 일이다. 겸재의 초기작부터 말년까지의 작품을 두루 읽는 것만큼 정확한 것은 없다. 겸재 정선(1676~1759)의 예술세계를 조명하는 대규모 기획전 《겸재 정선》이 지난 2일부터 6월 29일까지 경기도 용인 호암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다. 삼성문화재단과 간송미술문화재단에서 공동 개최했다. 본 전시는 2026년 하반기, 대구간송미술관으로 자리를 옮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