탐욕스러운 부자들의 도덕 불감증과 ‘찐’부자의 기준 [오인경의 그·말·이]
트럼프 대통령이 터트린 관세 폭탄이 전 세계 금융시장을 뒤흔들면서 새삼 부자들의 부도덕성이 부각되고 있다. 취임하자마자 자신의 이름을 딴 밈코인을 발행한 트럼프 대통령부터 문제다. 상상을 뛰어넘는 고율 관세 폭탄을 터트려 전 세계 금융시장을 대혼란에 빠트려놓고도 자신은 태연스럽게 마러라고 별장으로 달려가 연신 굿샷을 외치는 모습도 참으로 볼썽사나웠다. 그런 밉살스러운 모습을 반길 사람이 과연 전 세계에서 몇이나 될까. 며칠 전만 하더라도 그는 트럼프 밈코인을 많이 투자한 사람들을 백악관으로 특별 초청하는 이벤트까지 발표함으로써 하락세를 거듭하던 밈코인의 가격을 순식간에 70% 이상 폭등시키는 특출난 재주까지도 과시한 바 있다.
트럼프 대통령의 주변 인물들 또한 영화 <부당 거래> 속에서나 등장할 법한 여러 미심쩍은 행동들로 비난받고 있다. 전 세계 금융시장이 극도의 공포에 휩싸였을 때조차 ‘상호 관세 90일 유예’라는 엄청난 정보를 남들보다 먼저 알게 된 측근들이 자신들의 재산을 불릴 절호의 기회로 삼은 정황들이 드러나고 있기 때문이다. 이미 대통령 선거 기간부터 트럼프 후보와 찰떡궁합을 과시하면서 거액의 기부금을 쾌척했을 뿐만 아니라 정부효율부(DOGE) 수장이라는 막강한 자리까지 꿰찬 세계 최고의 부자 일론 머스크도 부자 특유의 밉살스러운 언행들을 쏟아내면서 많은 사람들로부터 반발과 저항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전 세계 최강국인 미국이 지구상의 그 어떤 나라보다도 깨끗하고 도덕적이라고 믿어온 수많은 사람들이 트럼프 2기 정권 출범 이후에 두드러지게 나타나기 시작한 ‘가진 자들의 횡포’에 분노하고 있지만, 우리나라 또한 사정은 크게 다르지 않다. 단적으로 수백만원짜리 명품 백은 설사 박절하지 못해서 받았다손 치더라도 주범들이 줄줄이 유죄 선고를 받은 도이치모터스 주가 조작 사건마저 무혐의로 불기소 처리한 건 부도덕한 권력의 횡포가 아니라면 설명이 안 되기 때문이다.
홈플러스를 무리하게 인수한 이후 점포 매각과 매장 직원 해고로 내내 시끄러웠던 MBK파트너스의 행태만 보더라도 탐욕스러운 부자들의 도덕 불감증 내지는 부도덕성을 여실히 알 수 있다. 홈플러스의 자금 사정을 빤히 알고 있는 경영진이 화의 신청 직전까지도 기업 어음을 발행하고 뒤늦게 수습책이랍시고 전 재산의 2% 남짓한 사재를 출연키로 한 것도 볼썽사납기는 매한가지다. 소액주주들이야 나락으로 굴러떨어지든 말든 자신이 보유한 주식부터 먼저 팔고 보자는 식으로 범죄 세력이 한껏 끌어올린 폭등 시세를 활용하여 거액의 주식을 미리 내다 판 키움증권과 서울도시가스 대주주들의 민낯도 가관이었다. 2차전지 테마주가 한국 증시를 연일 뜨겁게 불태우던 무렵엔 폭풍 질주를 거듭하던 에코프로의 회장이 내부정보를 이용한 선행매매로 실형을 선고받는 황당한 일도 있었다. 한때 시가총액 규모가 10조 원에 육박했던 금양은 ‘좋았던 시절’이 끝난 지 2년도 지나지 않아 상장폐지 절차를 밟는 중이다.
일찍이 애덤 스미스가 간파했듯이 부자들은 가난한 사람들의 원성을 사게 마련이다. 부자들의 풍요가 가난한 사람들의 질투심을 자극하기 때문이다. 하물며 그 부자들이 온갖 수단 방법을 가리지도 않고 노골적으로 자신들의 부를 늘리고자 한다면 대중들의 분노는 더욱 커질 뿐이다.
큰 재산이 있는 곳에는 반드시 큰 불평등이 존재한다. 한 사람의 큰 부자에 대하여 적어도 500명의 가난한 사람이 있으며, 소수의 풍요로움은 다수의 빈곤을 전제로 한다. 부자의 풍요는 가난한 사람들의 분노를 자극하는데, 빈민들은 빈곤에 내몰리고 질투심에 의한 부추김을 받아 부자의 재산을 침해하려고 한다. 수년에 걸친 노동에 의해, 또는 수 세대에 걸친 노동에 의해 획득한 귀중한 재산의 소유자가 하룻밤이라도 안전하게 잘 수 있는 것은 공권력의 보호 아래에서만 가능하다. 그는 언제나 알 수 없는 적들(그는 그 적들을 먼저 화나게 한 적이 없으면서도 결코 그들을 달랠 수 없다)에 둘러싸여 있다. -애덤 스미스 <국부론> 중에서.
부자와 가난뱅이를 구별하는 기준은 얼마일까? 나라마다 다르고 시대마다 다르다. 참을 수 없는 구별의 욕망을 지닌 인간은 그토록 가변적인 기준을 두고도 기어이 어떤 잣대를 들이대야 직성이 풀린다. 연봉이 1억원이면 많은가 적은가. 순자산이 10억원이면? 이런 사소한 질문들만 봐도 그렇다. 1초와 2초 사이에는 얼마나 무수한 숫자가 끼어드는가. 쉽게 쪼개고 나눌 수 없는 대상이라도 기어코 양쪽으로 갈라놓아야만 우리의 의식은 편안해진다. 인간의 의식을 깊이 연구한 프랑스의 철학자는 이와 같은 본능을 가리켜 ‘채워지지 않을 구별의 욕망’으로 불렀다.
채워지지 않을 구별의 욕망에 뒤틀려 의식은 실재를 상징으로 대체시키거나 또는 상징을 통해서만 실재를 본다. 이렇게 굴절되고 또 바로 그 사실 자체에 의해 재분열된 자아가 일반적으로는 사회적 삶의 요구에 그리고 특수하게는 언어의 요구에 무한히 더 잘 부응하기 때문에, 의식은 그러한 자아를 선호하고, 근본적 자아는 점점 시야로부터 잃어버린다. -앙리 베르그송 <의식에 직접 주어진 것들에 관한 시론> 중에서.
언제부터였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세계의 소문난 부자들을 대상으로 매일 ‘최신 부자 순위’를 친절하게 알려주는 사이트도 생겨났다. 적어도 전 세계 부자 순위 500위 안에 드는 사람이 누구인지를 두고 더 이상 쓸데없는 다툼을 벌일 필요는 없어진 셈이다. 블룸버그 억만장자 지수(Bloomberg Billionaires Index)가 매일 새롭게 변동된 부자들의 순자산과 전 세계 랭킹을 친절하게 알려주기 때문이다.
‘찐’부자들을 구별하는 기준은 시대를 거듭할수록 상향될 뿐 좀처럼 하향 조정되는 법이란 없다. 전 세계 인구가 계속 증가하는 데다가 기술 발전 속도도 갈수록 빨라지기 때문이다. 부의 축적 속도도 그만큼 빨라질 수밖에 없다. 불과 1세기 전쯤인 20세기 초반만 하더라도 찐부자들은 자동차와 철도 등 교통수단의 혁신을 주도한 사람들 차지였다. 기계문명의 발달과 함께 전 세계 자본 시장이 급속도로 팽창하면서 JP모건 등 금융 자본가들도 덩달아 거대한 부를 축적할 기회를 맞았다. 20세기 후반으로 넘어가면서 부자들의 판도에 급속한 변화가 나타났다. 컴퓨터와 인터넷이 등장하면서 인류의 전통적인 생활 양식을 송두리째 디지털 방식으로 바꿔버렸기 때문이다. 인텔과 마이크로소프트를 창업한 사람들이 순식간에 전 세계 최고의 부자 반열에 올라섰다. 인터넷 혁명은 21세기에 들어와 인공지능 혁명을 포함하는 디지털 혁명으로 이어지면서 전 세계 부자들의 리스트를 더욱 바쁘게 갈아치우고 있다.
최근에 전 세계 자본 시장이 크게 요동치면서 적잖은 변동을 겪었지만, 세계 최상위권 부자들의 순위는 거의 바뀌지 않았다. 부자들이 어렵게 쌓아 올린 부를 유지하고 방어하는 데 탁월한 능력을 발휘하기 때문이다. 지난 25일 기준으로 발표된 블룸버그 억만장자들의 리스트부터 간단히 살펴보자.
오늘날 전 세계 10대 부자들 속에는 21세기 디지털 혁명을 주도하는 인물들이 대거 포진해 있다. 최상위 10명 가운데 투자의 달인 워런 버핏과 프랑스 명품 브랜드 루이비통을 소유한 베르나르드 아놀트 정도만 예외일 뿐이다. 전 세계 부자 순위를 상위 20위까지 확대하더라도 사정은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 엔비디아를 이끄는 젠슨 황(16위) 등이 신흥 부자로 급부상한 반면, 월마트를 창업한 샘 월튼의 후계자들과 스페인의 의류업체 인디텍스를 소유한 아만시오 오르테가(14위), 세계 최대의 정유 단지를 소유한 릴라이언스 인더스트리의 무케시 암바니(17위) 정도만 전통적인 비즈니스 영역에서 아날로그 느낌을 주는 사업들을 영위하고 있을 뿐이기 때문이다.
상위 20명의 부자 명단을 보노라면 컴퓨터 혁명으로부터 시작된 디지털 혁명이 얼마만큼 ‘부의 지도’를 빠르게 재편하는지를 더욱 실감할 수 있다. 21세기 기술혁명을 주도하는 M7의 시가총액 증가 속도만 보더라도 다른 분야의 시가총액 증가 속도를 압도하기 때문이다. 몹시 특이한 예외가 하나 있다면 버크셔 해서웨이를 이끄는 투자의 대가 워런 버핏 정도다. 1930년생인 워런 버핏은 95세의 나이에 이르기까지 흐트러지지 않고 전무후무한 투자 실력을 발휘함으로써 거대한 부를 창출했다. 비록 2004년에 페이스북을 창업한 마크 저커버그보다도 부자 순위가 한 단계 낮지만, 버크셔 해서웨이의 엄청난 투자 성과가 그 때문에 폄훼될 이유는 조금도 없다. 버크셔 해서웨이의 장기적인 주가 흐름만 살펴보더라도 버핏이 얼마만큼 놀라운 성공을 이어왔는지 한눈에 알아볼 수 있기 때문이다.
워런 버핏이 특히 존경받는 이유는 지극히 상식적이면서도 합리적인 기준을 바탕으로 투자한다는 점과 자신이 세운 투자 원칙을 장기간에 걸쳐 지켜오면서 엄청난 투자 성과를 쌓아왔다는 점이다. 그는 남들이 탐욕을 부릴 때 덩달아 휩쓸리지 않았으며, 남들이 패닉에 휩싸여 주식을 마구 내던질 때 헐값에 조용히 주식을 사들이는데 정말로 탁월한 실력을 발휘한다. 전 세계 부자들의 순위가 최근 수십 년 동안 그토록 자주 바뀌었음에도 워런 버핏만큼은 늘 자신의 자리를 든든히 지켜냈다. 가장 최근에 발표된 ‘블룸버그 억만장자 인덱스’에서도 전년 대비 순자산이 가장 큰 폭으로 증가한 부자는 워런 버핏이었다.
그림 7_그래픽 오인경
블룸버그 억만장자 지수에는 전 세계 최고 부자 500인의 리스트뿐 아니라 연간 변동까지도 친절하게 알려준다. 트럼프 대통령이 취임 100일도 지나지 않아 고율 관세 폭탄을 터트리는 등 전 세계 증시가 격랑 속으로 휘말리는 동안에도 워런 버핏은 꾸준히 재산을 늘리고 있다. 올해 들어 순자산이 가장 많이 늘어난 부자들의 순서를 따로 살펴보면 아래와 같다. 순자산이 증가한 절대 금액만 보더라도 워런 버핏이 단연 돋보인다.
전 세계 최고 부자들의 순위가 얼마만큼 커다란 변동을 겪는지는 2004년 11월에 보도된 기사 하나만 살펴봐도 충분하다. 영국의 파이낸셜 타임스에서 ‘억만장자 특집’으로 25인 리스트를 발표했는데, 순자산 규모뿐만 아니라 해당 인물이 전 세계에 끼치는 영향력까지 함께 고려한 순위여서 특별한 주목을 끈 바 있다.
비록 21년 전에는 그토록 대단한 영향력을 지녔던 억만장자들이었지만, 지금껏 남아 있는 억만장자는 톱10 가운데 겨우 두 사람뿐이다. 그 당시 워런 버핏은 재산 규모로는 416억달러로 세계 2위였지만 영향력 면에서는 다소 낮은 평가를 받았다. 그는 당시 억만장자 25인 가운데 16위를 기록했다. 세계적인 부자들 가운데 버핏만큼 기부에 진심인 착한 부자도 드물다. 전 세계 억만장자 500인 리스트에 오르내리는 인물이라면 자신이 쌓아 올린 부를 사회에 되돌려주는 미덕도 갖출 필요가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이재용 삼성그룹 회장(340위)과 조정호 메리츠금융 회장(352위) 두 사람만 ‘500대 부자 명단’에 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