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클라베, 계몽(啓蒙)을 격몽(擊蒙)하다 [김경훈의 시네노믹스]

2025-04-07     김경훈 칼럼니스트
영화 ‘콘클라베’의 한 장면. /사진=디스테이션

서구 문명 입장에서는 세상의 중심이라고 부를 만한, 그만큼 안전하고 고요한 로마 바티칸 교황청에서 벌어질 수 있는 최대치의 권력투쟁, 그 격렬함을 그린 영화가 <콘클라베>다.

<콘클라베>에서 무엇보다도 흥미로웠던 것은 추기경 선거인단을 이끌고 새로운 교황의 선출에 전념하는 역할에만 머무를 줄 알았던 로렌스 단장의 출사표다. 그는 확신이 가져오는 배타성과 그로 인한 파쇼적인 위험을 언급하고 불확실성 속에 담겨 있는 관대함이나 변화의 가능성이야말로 영성의 영역이라고 말한다.

그의 말대로 확신이나 신념이 고착화하면 그 신념에 동조하지 않는 집단을 이른바, ‘계몽’(enlightenment)시키려 한다. 야만이나 짐승이라고 지칭하면서 구별 짓기가 이루어지고 나면, 남는 것은 삼키기 아니면 뱉어내기이다. 계몽되지 않는다면, 다른 말로 삼켜지지 않으면 배척하거나 축출한다.

20세기 두 번에 걸친 커다란 전쟁 이후 유럽의 지식인들, 특히 호르크하이머나 아도르노 등은 전체주의 앞에서 계몽주의가 거들먹거리고 있을 때야말로, 전체주의가 강화되고 폭력성이 증폭된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근대성이나 이성 혹은 합리성에 대한 의심을 시작했다. 그리고 독일 나치나 일본 군국주의 등 전체주의 세력에 의해 근대의 이성은 도구화되었다고 비판한다.

더하여 근대를 구성하는 대표적 가치가 한 번도 제대로 발현된 적이 없다거나, 정신/물질, 인간/비인간, 가치/사실, 주체/객체, 사회/자연, 정치/과학 등의 변증법적 범주들이 번역과 정화라는 실천 과정(다른 말로 모순관계의 실현)을 겪으면서 근대성은 오히려 흐릿해져 가고 있다고 관측하는 브뤼노라투르 같은 과학철학자도 있다.

주역의 64개 대성괘 중 4번째 괘(卦)는 ‘산수몽’(山水蒙) 괘인데, 교육의 중요성과 가르침을 구하는 학인의 자세 등을 기술하고 있지만 이를 문명사적 관점에서 보자면 ‘계몽의 변증법’이라고 할 만하다. 산수몽 괘는 효(爻)의 순서에 따라 제1효 발몽(發蒙), 제2효 포몽(包蒙), 제4효 곤몽(困蒙), 제5효 동몽(童蒙), 제6효 격몽(擊蒙)의 단계로 나아간다.

두번째 효인 포몽(包蒙)과 네번째 효인 곤몽(困蒙) 사이에 계몽(啓蒙)의 자리를 만들어 본다. 세번째 효의 효사(爻辭)는 ‘勿用取女 見金夫 不有躬 无攸利’로써 추호(秋胡)의 고사에서 나온 문구다. ‘춘추시대 노나라 사람 추호는 결혼한 지 닷새 만에 벼슬자리를 얻기 위해 진나라로 떠났다. 재상의 위치에 올랐지만, 진나라가 망하게 되자 노나라로 급하게 돌아오게 된다. 수년 만에 고향으로 돌아오는 길에 어떤 아름다운 부인이 뽕을 따고 있는 모습에 반해서 그녀에게 금덩이를 주며 유혹하였으나 그녀는 시크하게 거절한다. 고향 집에 돌아오자, 노모는 며느리를 불러 남편과 마주 보게 했는데, 바로 길가에서 부인을 꼬드기던 작자였다. 이에 부인은 남편이 어머니를 봉양하지 않고 타국으로 벼슬하러 간 것도 모자라 자기 아내를 몰라보고 금으로 유혹하려 한 것을 꾸짖으며, 수치심에 강물에 몸을 던진다.’

흔히 포몽(包蒙) 이후 타자에 대한 대상화가 불러오는 비극을 예견한 것이니, 계몽주의에 대한 우리의 경계심과 맞다 하겠다. 허울뿐인 근대가 타자를 야만이라 지칭하며 계몽한다는 건방짐이 결국은 근대성의 발아(發蛾)를 억제하고 세계를 파멸시킬 위험을 내포하고 있다는 것은 서슬 퍼렇다.

그러니 우리가 가야 할 길은 꽤 많이 남아 있다고 할 것이다. 여전히 곤몽(困蒙)식 엄숙주의를 거쳐 유아적인 동몽(童蒙)을 지나 격몽(擊蒙)에 이르러야 한다. 모두 변증법적 운동의 과정을 밟는다 할 수 있다.

때마침 콘클라베와 유사한 의사결정 구조를 지닌 헌법재판소의 탄핵 심판이 우리 눈앞에서 펼쳐졌다.

그 폐쇄성, 백성들은 시스티나 성당 굴뚝 위로 흰색 연기가 피어오르기만을 기다려야 한다는 일방적인 수동성(물론, 시민들은 결코 가만히 앉아서 기다리지는 않지만), 단순 과반이 아니라 70% 이상을 득표해야 한다는 것 등이 그렇다. 달리 말하면 종교/정치, 자연/인간, 세계/사회 등이 번역이라는 실천을 통해 서로 섞여 있는 것이다. 로렌스가 투표함에 기표 용지를 놓는 순간 천장이 폭발하는 것이 특히 그러한 하이브리드의 절정이다. 즉 교회의 일에 인간 사회가 끼어드는 것이다.

하지만 로렌스가 아닌 카불의 추기경 베니테스가 최후의 당선자가 된 것은 정화의 실천적 작용이라고 보기 어렵다. 즉 종교적 장치에 끼어든 인간 사회의 분쟁을 분리해서 제거하지 못한 것이다. 그렇지만, 오히려 한 걸음 더 나아가 계몽의 단계에서 곤몽(困蒙)의 단계로 진화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유럽과 이슬람 문명의 충돌 과정을 너무나도 오랫동안 보아온 우리로서는 바티칸의 인류애와 평화를 위한 노력이, 결코 이스라엘과 트럼프의 이란에 대한 공격을 멈추게 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또한 동유럽을 포함한 유럽이 러시아·인도·중국·동남아시아 등과 육상 교역로를 활성화하지 않는 한, 그들이 미국을 다시 능가하는 일은 없을 것이란 것 또한 알고 있다.

글을 쓰고 있는 도중에 드디어 헌법재판소가 탄핵에 대한 인용 결정을 내렸다. 우리는 잠시 야만으로의 회귀를 목전에 두고 머뭇거렸지만, 단번에 계몽에서 격몽(擊蒙)으로 점프한 것이다. 천지신명(天地神明)이 이 땅에 살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의 기원과 바람에 응하고 내려와 며칠 동안 공기가 서늘했던 것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