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키 7’과 ‘미키 17’, 소설과 영화의 가장 큰 차이 [김범준의 세상물정]
에드워드 애슈턴의 ‘미키 7’과 봉준호 감독의 ‘미키 17’
얼마 전 개봉한 봉준호 감독의 영화 <미키17>을 재밌게 봤다. “죽는 것이 직업”인 주인공의 모습이 한편으로는 가슴 아프게, 또 한편으로는 유머러스하게 그려진다. 영화와 함께 에드워드 애슈턴의 원작 소설 <미키7>도 읽었다. 재미도 있지만, 소설과 영화에 담긴 철학적인 고민의 깊이도 상당하다. 죽음이란 무엇인지, 죽음에 대한 두려움의 근원은 무엇인지, 과거의 나와 지금의 나를 구분 짓는 것은 과연 어떤 것인지 고민하게 하고, 인간이 아닌 생명에 대한 우리의 태도를 되돌아보게도 한다. 익스펜더블인 미키의 모습에서 얼마든지 대체가 가능한 존재로 간주하는 산업자본주의 사회의 노동자를 떠올리기도 했고, 우주선 지도자의 황당하고 우스꽝스러운 모습에서 현대의 몇 정치인을 떠올릴 수도 있었다.
책의 맨 앞에는 보통 누구에게 이 책을 헌정한다는 글귀가 등장한다. 작가는 “젠에게, 당신이 <문명>을 그만두게 하지 않았다면 이 중 어떤 일도 일어나지 않았을 거야”라는 재밌는 감사의 글을 헌정사로 적는다. 컴퓨터 게임 <문명>은 무척이나 재밌다. 이 게임에 몰입해 다른 어떤 일도 할 수 없게 되는 상황을 “운명하셨습니다”에 빗대어 “문명하셨습니다”로 일컫는 재밌는 표현이 우리나라에 있을 정도다. 소설을 읽기 시작하기도 전에 유머러스한 헌정사에 웃음을 크게 터뜨렸다. 소설의 시작도 평범치 않다. “지금껏 죽어 본 중에 가장 멍청한 죽음을 맞이하게 될 것 같다”로 궁금증을 한껏 일으키며 소설이 시작한다.
소설의 배경은 먼 미래다. 반물질 폭탄이 개발된 후 곧 지구에서는 전쟁이 일어난다. 가까스로 생존한 몇 인류 공동체는 함께 지구에 계속 머물면 결국 공멸할 수밖에 없는 인간의 본성을 두려워해, 우주 곳곳으로의 이주, 디아스포라를 시작한다. 인류 일부가 이주한 미드가르드 행성에서는 거의 모든 산업과 농업이 이미 자동화되어 정부는 수확물을 인구수로 나누어 균등하게 공급해 큰 경제적 곤란을 겪는 이는 거의 없다. 바이오 프린팅 기술로 얼마든지 인간의 신체를 복제할 수 있고, 기억을 다운로드하고 업로드하는 기술도 이미 개발된 미래다. 신체와 기억에 관련된 모든 정보를 잘 저장해 놓고는 죽은 사람과 똑같은 몸과 기억을 가진 사람을 뚝딱 만들어 낼 수 있는 세상이다.
주인공 미키 반스의 미드가르드에서의 직업은 딱히 직접적인 현실 유용성은 없는 역사가다. 미키의 학창 시절 친구인 2미터 장신 베르토는 운동선수로 성공한 후 은퇴했고, 은퇴 후 9년 만에 다시 선수로 복귀한다. 젊을 때와 달리 베르토가 그리 뛰어난 성적을 거두지 못할 것을 확신한 미키는 베르토가 패배할 것에 전 재산과 빌린 돈을 건다. 미키에게는 안된 일이지만 베르토는 복귀한 다음에도 엄청난 성공을 거두고, 결국 미키는 큰 채무를 지게 된다. 미키가 돈을 빌린 다리우스 블랭크는 엄청난 고통을 주는 고문 기계로 미키를 괴롭히고, 미키는 우주선 드라카에 익스펜더블이라는 역할로 탑승해 블랭크로부터 도피하게 된다. 방사능으로 오염된 환경에서 일하거나, 미지의 외계 병원체에 대한 인체의 반응을 살펴보거나 하는 일에 투입되는 익스펜더블은 임무 수행으로 사망하면 얼마든지 다시 저장해 놓은 이전의 정보를 이용해 같은 신체와 같은 기억을 가진 존재로 다시 재생된다. 그렇다면 미키는 블랭크에 의한 끔찍한 한 번의 고통스러운 죽음, 혹은 이를 피하는 딱 한 번의 자살 대신, 수많은 죽음을 선택한 셈이다. 한 번의 죽음 대신 여러 번의 죽음과 재생을 선택한 미키의 선택은 어떤 의미일까? 우리가 죽음을 두려워하는 이유가 과정에서의 고통 때문인지, 아니면 존재의 소멸 때문인지를 고민하게 하는 장면이다.
미키 7이 마지막으로 기억을 업로드한 것은 소설 시작 시점의 6주 전이다. 그렇다면 미키 8은 미키 7의 마지막 6주간의 경험을 다운로드할 수 없고, 따라서 미키 7이 행여 죽었더라도 죽음의 경험과 기억은 전달받지 못한다. 업로드 시점과 죽음의 순간 사이의 시간 간격을 0으로 만드는 방법은 없어서 각각의 미키는 자신의 죽음을 딱 한번 경험할 뿐이다. 영화와 소설에서 많은 이가 “죽는 건 어떤 기분이야?”를 미키에게 묻지만, 미키는 답할 수 없다. 이 질문을 들은 미키는 죽음을 단 한 번도 경험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미키 n은 1부터 n-1까지의 많은 탄생을 기억할 수는 있어도, 각각의 미키는 단 한 번 죽을 뿐이다. 미키 8이 미키 7과 같은 존재인지 소설은 반복해 독자에게 묻는다. 만약 각각의 미키가 유일한 존재라는 것에 동의한다면, 그 근거는 어쩌면 죽음의 유일성일 수 있다. 각각의 미키가 경험하는 단 한 번의 죽음을 떠올리면서, 미키와 달리 여러 번 미키의 죽음에 동참하고 공감한 연인 나샤의 아픔과 슬픔을 가만히 생각해 본다.
소설의 제목은 미키 7이지만, 영화의 제목은 미키 17이다. 니플하임 행성 착륙 직후 대기 미생물에 의한 감염과 백신 테스트의 과정에서 영화의 미키는 소설보다 10번이나 더 많은 죽음을 겪는다. 감독의 의도를 알 수는 없지만, 영화의 두 숫자 17과 18을 보면서 나는 미국의 성년 기준 연령인 18세를 떠올렸다. 미키는 매번 죽음과 재생을 반복하는 과정에서 점점 경험과 기억이 축적된다. 마치, 현실의 우리가 한 살 한 살 나이를 먹으며 경험이 쌓이는 것처럼 말이다. 결국, 작년의 나와 올해의 내가 같으면서 다른 이유는 1년이라는 시간 동안 경험의 차이다. 그렇다면, 미키 17에서 미키 18로의 변화가 성년이 되는 큰 변화를 상징한다고 할 수도 있다. 영화에서 미키 18이 스스로 목숨을 희생하는 장면을 보면서, 성년과 성숙의 의미를 생각했다. 소설의 미키 8은 다른 방식으로 죽는다. 스포일러가 될까 봐 자세한 내용은 생략.
소설의 8장에서 미키는 드라카 우주선 탑승 전 익스펜더블의 임무 교육을 받는다. 교관인 젬마는 미키에게 유명한 테세우스의 배 이야기를 들려준다. 긴 항해 중 배의 부품을 하나씩 교체해서 처음 출항 때의 부품이 모두 교체된 배가 항구에 입항한다. 이 배는 출항할 때와 같은 배인가를 묻는 흥미로운 철학적 질문이다. 젬마는 우리 몸의 세포 중 10년 전에도 존재했던 세포는 없어서, 결국 자연스러운 인간의 몸도 10년 전과 같은 몸이 아니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익스펜더블이 바이오 프린팅으로 재생되는 과정은 어차피 우리 몸에서 일어나는 과정을 그냥 빠르게 진행시킨 셈이 아니냐고 묻는다. 생각이 이어진다. 만약, 우리가 매일 밤 잠들 때, 사실 우리는 의식이 없는 상태에서 죽음을 맞고, 다음 날 아침 태어난 나는 재생된 신체에 잠든 시점 이전의 모든 기억을 업로드한 나라고 상상해보자. 그렇다면, 과연 나와 익스펜더블의 차이는 무엇일까?
영화와 달리 소설은 인간들이 왜 중복 복제된 멀티플을 두려워하고 혐오하는지에 대한 배경을 자세히 설명한다. 앨런 매니코바는 바이오 프린팅 기술에 인간 정신 복제 기술을 결합하는 방법을 발견해서 큰돈을 번다(영화에서는 동명의 사람이 자신의 복제본을 만들어 범죄를 저지른다). 부자들에게 거둔 세금으로 모두에게 물품을 무상 공급하는 사회 시스템에 불만을 품은 부유한 이들이 이주한 골트 행성에 도착한 매니코바는 스스로를 계속 복제해 내기 시작한다. 가장 손쉬운 방법은 골트 행성의 인간 몸의 단백질을 재료로 이용하는 것이었고, 결국 매니코바는 수많은 자신의 복제본에 무기를 들려서 골트 행성을 점령한다. 다른 행성으로 이주해 매니코바가 복제를 계속하는 것을 두려워한 우주의 인류 연합체 유니언은 골트 행성을 공격하지만 매니코바에게 일격에 패배한다. 이때 등장한 것이 바로 총알 작전이다. 그리 크지 않은 질량을 가진 물체라도 빛의 속도에 가깝게 가속시키면 엄청난 에너지를 갖게 된다는 물리학을 이용한 작전이다. 빠르게 가속한 물체를 총알처럼 이용해 골트 행성 전체가 파괴되어 결국 (모든) 매니코바는 죽음을 맞게 된다. 이때부터 유니언의 모든 인간은 멀티플에 대한 극도의 두려움과 혐오의 감정을 갖게 된다는 배경이 소설에 소개된다.
소설과 영화의 큰 차이 중 하나는 니플하임의 지각 있는 생명체 크리퍼다. 소설의 크리퍼는 지구 생명체 중 개미 집단을 닮았다. 여왕개미가 모든 일개미를 낳고, 일개미는 생식능력을 갖지 않는다. 개미 집단 전체의 입장에서는 일개미 한 마리 한 마리는, 마치 우리 몸의 세포 하나하나처럼, 중요한 존재의 의미를 갖지 않는다. 소설에서 크리퍼 여왕(우두머리 개체)은 인간 개인 하나가 죽음을 맞는 것을 안타깝게 생각하는 인간을 이해하지 못한다. 영화는 다르다. 영화의 크리퍼 여왕은 집단을 구성하는 한 마리 한 마리 크리퍼의 죽음을 크게 슬퍼한다. 이 부분은 솔직히 난 영화가 소설보다 좋았다. 영화는 익스펜더블 미키의 삶에 무심한 인간과 수많은 크리퍼 중 하나일 뿐인 조코와 루코의 죽음과 불행을 안타까워하는 크리퍼 여왕을 대조시킨다.
소설과 영화는 결말이 다르다. 다른 결말이 궁금하다면 소설과 영화를 꼭 꼼꼼히 보기를 추천한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이 내겐 인상 깊었다. 숫자판이 철컥철컥 하나씩 넘겨지면서 시간을 표시하는 시계가 있다. 이 시계를 연상시키는 장면에서 Mickey 17과 18의 숫자가 번갈아 화면에 나타나다가 숫자가 사라지고 원래의 이름인 Mickey Barnes가 표시되며 영화가 끝난다. 익스펜더블이든 아니든, 우리 각자는 제각각 유일한 존재다. 숫자로만 표현되기에는 너무나도 소중한 존재다.
*책과 영화를 보고 함께 이야기 나눌 주제
1. 봉준호 감독은 크루아상과 아르마딜로를 떠올리며 영화의 외계 생명체 크리퍼를 디자인했다고 말합니다. 저는 영화를 보면서 공벌레(쥐며느리)와 곰벌레를 떠올렸어요. 공벌레는 습하고 음침한 곳에 서식하고, 아주 작은 생명체인 곰벌레는 혹독한 환경에서도 살아갈 수 있으니까요. 수많은 크리퍼가 무리를 지어 설원을 달리는 장면에서는 한때 북미에서 번성했던 아메리카들소를 떠올리기도 했습니다. 인간이 북미 대륙을 차지하기 전에는 어쩌면 그곳은 니플하임의 크리퍼처럼 아메리카들소의 세상이었다고도 할 수 있지 않을까 해요. 여러분은 크리퍼의 모습에서 어떤 의미를 떠올렸나요?
2. 내가 여러 번 바이오 프린팅되어서 여럿이 된 상황을 가정해 보죠. 이때 나의 복제본 중 하나가 저지른 범죄에 나도 책임이 있는 것일까요? 모든 생체 정보가 동일해서 복제본 중 범죄를 저지른 이를 특정할 수 없다면, 우리는 누구에게 범죄의 책임을 물어야 할까요?
3. 미키 반스는 다리우스에 의한 고통스러운 한 번의 죽음 대신, 여러 번의 죽음을 택합니다. 죽음의 두려움은 과정에서의 고통에 기인하는 것일까요? 아니면 의식의 소멸에 대한 두려움 때문일까요?
4. 소설에는 외계 미생물에 감염되어 피를 토하는 미키를 보며 한 의료국 직원이 귀찮게 시트를 빨아야 한다고 불평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저는 이 장면에서 식품 공장에서 빵이나 과자 반죽을 만드는 일을 하는 노동자가 다쳐서 피를 흘릴 때, 다른 이가 저 아까운 반죽을 버려야하나 고민하는 상황을 떠올렸어요. 소설과 영화를 보면서 산업 사회의 노동자를 유일성을 가진 소중한 개인이 아니라, 숫자로 환산할 수 있는 노동력의 크기로만 간주하는 안타까운 모습이 떠올랐죠. 영화의 우주선 공간이 마치 탄광이나 공장의 내부처럼 보이기도 해요. 이 영화를 산업자본주의 사회에 대한 비판으로 읽을 수 있을까요?
5. 영화에 등장한 우주선의 최고 지도자 마샬을 보면서 몇 나라의 정치인을 떠올리는 사람이 많습니다. 감독에 따르면 실제 특정 정치인을 떠올리며 영화를 만든 것은 아니라고 해요. 그런데도 왜 우리는 기시감을 느낄까요? 현대의 정치인과 마샬의 어떤 모습에서 우리는 유사성을 발견하는 것일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