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관 옆 동물원 [강태운의 빛과 그림자]
서서히 물들어가는 추상을 상징하는 미술관과 현장에서 생동감을 직시할 수 있는 동물원을 사이에 두고 갈림길에 선다. 한 사람은 왼쪽으로 미술관을, 다른 사람은 오른쪽으로 동물원을 향한다. 서로의 차이를 보여주는 장면 같지만, 둥근 지구 위에 사는 이상 길은 다시 연결된다. 저쪽이 싫다고 이쪽을 선택해 걷다 보면 그 끝은 내가 눈길도 주지 않았던 저쪽의 시작이다. 저쪽을 알고자 하는 마음이 움트는 순간 사랑은 시작된다.
이해하기 힘든 장면을 만나면, 사람들은 한 발짝 뒤로 물러서서 낯설게 바라보려고 한다. 이해되지 않는 그림처럼, 바라보는 것만으로는 길을 찾기가 쉽지 않다. 눈앞에 보이는 것에 매몰되지 않고, 이면에 숨겨진 진실을 찾기 위한 방법으로 ‘삼독’(三讀)이 있다. 그림을 읽는다면 ‘화삼독’(畵三讀)이다. 그림을 읽고, 작가와 그 시대를 읽고, 마지막으로 나를 읽는 것이다.
그림을 세 번 읽다 보면 미술관인데 동물원에 온 것 같은 생동감이 느껴질 때가 있다. 오늘 미술관에서 만난 그림은 파울 클레(Paul Klee, 1879~1940)의 <황금물고기>다. 동화 속 한 장면을 그대로 옮겨 놓은 듯한 그림이다. 클레는 꿈과 동심의 세계를 환상적 색채로 표현한 화가다. 클레가 황금물고기를 그린 배경을 밝히지 않아서 어떤 의도로 그렸는지를 두고는 해석이 분분하다.
클레는 ‘바우하우스’라는 독일 예술 종합학교 교수였다. 1차 세계대전과 경제 불황의 그늘이 짙었던 당시는 기존 질서에 대한 저항과 허무가 시민들 사이에 팽배했다. 인간을 소외시키는 문명에 대한 거부로 전통적인 구상보다 추상을 선호하던 시기였다. 추상 화가들은 자연에서 형태를 빌리지 않고 선과 색채만으로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새로운 조형을 창조할 수 있다고 자신했다. 당시 추상 미술의 기세는 거칠 것이 없었다. 하지만 클레는 자연과 기존 질서를 부정하는데 매몰되지 않았다. 클레는 구상과 추상 사이에서 외줄타기를 했지만, 질서와 체제 속에서 음악처럼 조화로운 그림을 추구했다.
클레는 일곱 살 때부터 바이올린을 배웠고 수준 높은 연주 실력을 뽐냈다. 클레 그림에서 느껴지는 선의 리듬과 색채의 멜로디는 음악이 그의 그림을 이해하는 열쇠라는 걸 알려 준다. 리듬은 단순한 반복이 아니다. 높고 낮고, 빠르고 느리고, 규칙과 불규칙 사이에서 균형을 잡는 일이다. 독일 나치 정권은 클레 작품이 현실적이지 않고 퇴폐적이라며 교단에서 내쫓고 작품을 압수했다. 황금물고기를 나치 정권에 빗댔다는 해석이 있다. 겉보기엔 번쩍번쩍 빛나지만, 퀭한 눈을 보면 맞는 이야기 같다.
황금물고기에 시들해질 즈음 주위가 시선에 들어온다. 파란색 선과 수초가 눈에 띈다. 무엇보다도 물고기 친구들이 보인다. 그런데 친구들이 조금 이상하다. 황금물고기와 거리를 두고 눈을 마주치지 않는다. 친구들은 황금물고기와 사이가 나쁜 것 같다. 이렇게 황금물고기 옆에 친구들을 그린 것만으로 다양한 이야기가 만들어진다. 인간은 혼자 사는 동물이 아니다. 서로 어울려 이야기하고 다투면서 관계를 맺는다. 감상하는 그림에서 관계를 맺는 그림으로 바뀌는 순간이다. 서사가 있는 그림은 관람객을 오래 머물게 한다.
황금물고기는 잘난 체하는 물고기였다. 황금빛에 몸도 건장하다. 황금물고기가 자리 잡은 중심은 접촉면이 사방에 걸쳐 있다. 관계 맺기가 수월한 자리다. 그만큼 영향을 많이 받고 영향을 많이 끼친다. 경쟁의 시선으로 보면 관심이 집중되는 힘든 자리다. 속내를 털어놓을 친구가 있으면 위로가 될 텐데 친구들은 황금물고기를 외면한다. 가장자리에 있는 친구들은 잘난 체하는 황금물고기가 못마땅했다. 가장자리는 다른 말로 변방이다. 변화는 중심이 아닌 변방에서 시작된다. 변방의 변화를 중심부에서 감당하지 못하면 중심부는 혼란을 겪었다. 황금물고기는 친구들과 사이가 틀어지면서 느낀 바가 많았다. 다시 원만한 관계를 맺고 퀭한 눈을 맑게 바꾸고 싶다. 이야기가 여기까지 이르면 지금 보는 황금물고기는 반성을 통해 새로 거듭난 물고기가 된다. 어제의 그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이 그림에서는 관계의 떨림이 느껴진다. 황금물고기 혼자였다면 아무런 떨림을 느낄 수 없었을 것이다. 검푸른 바다가 아니라 에탄올 병 속에 박제되어 전시된 물고기 같다고나 할까. 황금을 둘렀어도 자기 혼자서는 아무런 관계를 맺을 수 없다. 꽃은 피었는데 주위에 벌과 나비가 없으면 그 꽃은 외롭다. 벌과 나비가 곁에 있어서 꽃은 향기를 갖는 것처럼 그림에도 이야기가 시작된다. 이야기가 있는 그림은 사람을 머물게 한다.
그림은 세 번 읽어야 한다. 화삼독(畵三讀)이다. 그림을 읽고, 작가와 그 시대를 읽고, 마지막으로 나를 읽는다. 먼저 그림을 보면서 황금물고기와 친구 사이의 틀어진 관계를 읽는다. 작가와 그 시대상으로 국가 권력이 국민의 생활과 예술을 통제했던 독일 상황과 이에 굴하지 않고 나치에 저항했던 파울 클레를 읽는다. 이제 나를 읽을 시간이다. 나 역시 황금물고기처럼 행동하고 있지 않은가. 깨닫고 나면 과거의 나로 돌아갈 수는 없다. 그렇게 추상에서 현실의 나를 읽는 순간 미술관과 동물원은 하나로 연결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