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르신, 노숙인과 온동네 살피미 [최준영의 낮은 곳의 인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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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르신, 노숙인과 온동네 살피미 [최준영의 낮은 곳의 인문학]
  • 최준영 책고집 대표
  • 승인 2022.12.22 16:3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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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희망원.
광주희망원.

#1. 인천의 미혼모 시설에서 강의하던 때였다. 미혼모와 아기들을 위한 책 모으기 운동을 벌이는 와중에 인천시장 비서실에서 문의가 왔다. “우리 시장님이 도울 일은 없느냐?”라는 게 요지였다. 책 모으기는 이미 마무리됐으니 굳이 돕고 싶다면 시설에 한 번 방문해서 어떤 도움이 필요한지 살펴봐 주면 좋겠다고 답변했다.

며칠 후 시설의 원장 수녀님 마음이 다급해졌다. 인천시청에서 다음 주에 시장이 시설에 방문하겠다고 통보가 왔기 때문이었다. 수녀님과 미혼모들의 시장 맞이를 위한 노력은 그야말로 눈물겨울 정도였다. 시설 전체를 뒤집다시피 대청소했고, 아이들에겐 최대한 좋은 옷을 입혀서 맞이하기로 했다.

오기로 한 날 시장은 오지 않았다. 왜 못 오게 되었는지, 그럼 언제쯤 올 것인지 아무런 연락이 없었다. 무시하고 넘어갔을 뿐이다. 짐작하건대, ‘선거가 코앞인데 고작 스무 명밖에 안 되는, 유권자도 몇 명 되지 않는 곳을, 굳이 방문할 필요가 있겠느냐’는 내부 의견이 있었을 듯싶다. 애초 뭘 바라는 게 있는 게 아니었다. 공연히 마음 뒤흔들어놓고 무시당했다는 사실에 부아가 치밀었다.

#2. 인문독서공동체 책고집을 설립한 뒤 거리의 노숙인과 가난한 어르신들을 위한 인문학 강좌를 기획하느라 고군분투했다. 옆에서 지켜보던 시민사회활동가 후배가 조언했다. 관에 찾아가서 도움을 요청하는 게 어떻겠냐고. 다리를 놓을 테니 같이 한번 찾아가 보자는 것이었다. 썩 내키지는 않았지만 일말의 기대를 품고 찾아갔다.

지자체의 ‘실세’로 불린다는 비서관을 만났다. 예의 노숙인 인문학과 어르신 인문학의 취지를 역설했다. 돌아온 비서관의 답변이 어이없다. “그런 사람들(노숙인, 어르신)은 도와줘 봐야 표가 안 돼요. 그들보다는 청년이나 주부 대상 프로그램을 기획해 보세요. 그럼 열심히 도울 게요.”

#3. 서울시는 지난해 말 2022년도 예산을 편성하면서 안전과 위생, 건강권의 사각지대에 놓여 있는 노숙인을 위한 최소한의 안전장치라고 할 수 있는 노숙인 진료비 예산을 5억원이나 삭감했다.

서울시의 설명인즉슨, 전년도 사업예산이 남아서 부득이 삭감하게 되었다는 거였다. 말인즉, 일을 안 했던 것이고, 궁색한 변명에 불과했다. 코로나19를 맞아 거리의 노숙인을 위한 적극 행정, 현장 행정을 게을리했기에 예산이 남았던 것이다.

올해 6월 한 신문의 지면을 통해 인문독서공동체 책고집에서 어르신 인문학을 진행하고 싶다는 의지를 피력했다. 며칠 후 거짓말 같은 일이 벌어졌다.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직원이 찾아와서는 칼럼을 읽고 감동받았다며 강의 비용을 지원하고 싶다는 것이었다. 간절히 원하면 온 우주가 도와준다는 말이 실감 나는 순간이었다.

그렇게 수원시 소재 우만종합사회복지관의 어르신 인문학이 시작됐다. 수강생 모집 때부터 성황이었다. 순식간에 수강생 20여 명이 모였다. 대부분 70, 80대 어르신들이었다. 그럴싸한 강좌명도 붙였다. ‘삶의 이야기를 나누는 우리동네 인문학’이다. 10주 동안 다양한 강의를 했고, 이어서 5주 동안 글쓰기 강의까지 했다. 총 15강을 적극적으로 참여한 어르신들이 직접 쓰고 그린 글과 그림을 모아 문집을 제작하고 그럴싸한 액자도 만들었다.

지난 10일 인문독서공동체 책고집 4주년을 맞아 회원들과 함께 어르신들의 열정과 노고를 위로하고 존경의 마음을 표하는 자리를 마련했다. 문집과 액자를 선물 받은 어르신들은 끝내 눈물을 흘리셨다. 너무 큰 선물과 과분한 대접을 받아서 몸 둘 바를 모르겠다는 말씀도 주셨다. 덩달아 자리를 함께 한 책고집 회원들도 마음으로 울었다.

어르신을 위한 인문학 강의, 진작부터 했어야 했다. 더 많이 더 길게 더 정성껏 해야 할 일이다. 만시지탄이지만 오랫동안 꿈꾸었던 일을 성사하게 되어 더없이 기쁘고 즐거웠다. 어르신 인문학 강의에 참여한 강사들은 죄다 책고집 회원이다. 대학교수도 있고, 평범한 직장인도 있다. 각 분야에서 활동하는 분들을 어르신 인문학으로 묶어냈다. 참여 강사들의 소회를 듣는 자리 또한 감동이었다. 여럿이 함께 한 일이어서 더욱 값진 경험이 되었다. 인문독서공동체 책고집은 앞으로도 가난하고 외로운 이웃들과 함께할 것이다.

#4. 서로돌봄마을 조성사업 ‘온동네 살피미’

지난 주 복지관에서 강의요청이 왔다. 가보니 강의할 분위기가 아니었다. 대화의 시간으로 전환했다. 강의보다 ‘온동네 살피미’ 활동을 해온 분들의 마음을 살피는 일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혹은 수줍게 혹은 자랑스럽게 한 마디씩 해주셨다. “우리 마을이잖아요. 누가 지키겠어요. 우리가 지켜야지요.” 짧은 말속에 사업의 취지와 의미가 오롯이 녹아 있었다. 이어지는 말에 도리없이 눈물을 훔쳐야 했다. “원래 가난하고 힘든 사람들끼리는 서로 돕는 문화가 있어요. 이번 사업은 대단한 일이라기보다 그저 이웃으로서 해야 할 일을 한 것뿐이라고 생각해요.”

송파와 수원의 세 모녀 사건으로 복지 사각지대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높아졌다. 그러나 복지 사각지대를 메우는 일은 정부나 지자체의 노력만으로 가능하지 않다. 이웃을 잘 아는 사람은, 같은 마을에 사는 이웃이다. 그 이웃이 움직이고 있다. 수원의 우만복지관에서 시범 실시한 온동네 살피미 사업이 내년부턴 확대될 조짐이다. 지자체에선 예산을 만들었고, 마을주민들은 기꺼이 봉사할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다.

칼럼에 모두 4개의 에피소드를 실었다. 앞의 3개는 가난한 사람을 대하는 정치권의 반응이자 태도에 대한 것이다. 정치는 종내 소외계층을 외면해 왔다. 가난한 이웃에 대한 관심은 그저 수사로서만 존재할 뿐이고, 오로지 표가 되는 사람에게만 관심을 가질 뿐이다. 그러한 정치행태의 결과는 불을 보듯 뻔하다. 소외의 역전이 일어날 것이다. 정치가 소외시킨 가난한 이들이 이젠 정치와 정치인을 소외시킬 것이다.

마지막 에피소드는 평범한 사람들의 사는 모습을 담았다. 정치가 외면하고 소외시킨 사람들을 이웃들이 나서서 보듬고 살피는 모습이다. 그리도 소중한 일을 하는 사람은 특별한 사람이 아니다. 길에서 골목에서 마을 어귀에서 흔히 만나는 사람들이다. 이웃을 소외시키지 않는 그들이 바로 영웅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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